글 박정준 강남대 글로벌경영학부 교수
반덤핑, 상계관세, 세이프가드 같은 무역구제제도는 도입국 입장에선 반드시 필요하지만 상대국에게는 부정하고 싶은 성격의 것이다. 그만큼 도입국 내 관할 기관이 공정하게 조사, 판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그 역할을 맡은 곳이 바로 무역위원회다.
1987년 7월 1일 설립된 우리 무역위원회(KTC)는 1995년 1월 1일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보다도 역사가 깊다. KTC 판정에 근거해 취해지는 무역구제제도는 본래 무역을 제한하는 보호무역 성격이기에 KTC는 그 무엇보다도 ‘공정’과 ‘투명’을 최우선 가치로 여겨왔다. 물론 우리의 조치 대상이 되어 당장 무역에 장애가 발생하게 되는 수출국들은 우리가 내린 공정과 투명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관점에서 2004년부터 2005년까지 우리와 인도네시아 간 종이 분쟁(DS312)은 KTC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대한 책임감 있는 역할을 WTO가 공인해준 유의미한 사례로 기억된다.
인도네시아산 종이 수입 과정에 덤핑이 있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다며 KTC에 조사를 신청한 것은 국내 한솔제지·한국제지 등 5개 기업이었다. 이들은 2002년 9월에 KTC에 조사를 의뢰했고 KTC는 11월 인도네시아 4개 기업에 대해 질의서 등을 활용한 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이듬해 2003년 9월에 나온 KTC의 최종 판정은 덤핑과 산업 피해에 대한 최종 긍정이었고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에게 인도네시아 3개 기업에 8.22%의 통일 반덤핑관세를 향후 2006년까지 3년 동안 부과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재정경제부는 2003년 11월부터 2006년 11월까지의 실제 반덤핑관세 조치로 응답했다. 결국 기각되기는 했으나 인도네시아는 해당 조치에 대해 우리 법원에 취소소송을 내는 한편, 2004년 6월 우리나라를 반덤핑조치 결정에 필요한 자료 검토의 불충분성을 이유로 WTO에 제소했다.
결국 2004년 9월 우리나라와 인도네시아 간 종이 분쟁에 대해 판결할 패널이 설치됐다. 인도네시아의 제소에 따라 WTO 분쟁해결기구가 판결 내려야 할 주요 쟁점은 덤핑마진 산정 및 우리나라 종이산업에의 피해 판정 등과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결과적으로 2005년 10월 WTO 분쟁해결기구 1심 패널 판정에서 우리나라는 대부분 승소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조사 대상 기업이 질의서 등에 대해 미응답으로 대응하여 자료 미제출 상황에 해당하면, 이번 KTC가 그랬던 것처럼 이용 가능한 자료(Facts Available)를 바탕으로 판정을 내릴 수 있음을 인정해주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해당 대체 자료의 신뢰성을 충분히 확인, 검증하지 않은 것은 지적받기도 했다. 또한 인도네시아 3개 회사에 대하여 단일의 덤핑마진을 산정한 것 역시 인도네시아의 불만을 야기했는데 WTO 판결은 해당 회사들이 표면적으로 독립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소유권이나 조직 내 인사 구성으로 미루어볼 때에 높은 수준의 유사성이 발견될 경우 동일한 수출자로 인정될 수 있다고 봤다. 이처럼 주요 쟁점에서 대부분 승소한 우리나라는 KTC의 초기 판정에 따른 반덤핑관세를 유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다.
인도네시아와의 종이 분쟁이 WTO의 최종 승소로 마무리되면서 우리 KTC의 우수한 역량이 국제무대에서 나름의 공인을 받게 되었으나 만에 하나 패소했더라면 그 평가가 정반대도 될 수 있었다. 국내 산업에 대한 정당한 보호를 책임질 중대한 조직의 역할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냉정할 수 있고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의 차이라는 것을 바로 이 ‘종이 분쟁’이 증명한 격이다.
자료 : 『무역위원회 30년사: 공정무역 질서 확립 30년을 담다』(무역위원회, 2017), 『WTO 상품무역법』(정찬모, 2018) 및 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