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 북인도를 비롯한 동방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연령과 인종에 상관없이 페스트(흑사병)가 퍼지고 있다. 전염병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차츰차츰 번져나가 마침내 흑해와 시리아, 터키와 이집트, 홍해와 북방의 러시아, 그리스, 아르메니아까지 모두 퍼졌다….” 이는 최근의 코로나19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1346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연대기 작가인 마테오 빌라니가 흑사병 소식을 기록한 것이다. 흑사병은 당시 유럽 사회의 경제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글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중기과학부 부장
이 전대미문의 대공포가 지나간 뒤 살아남은 사람에겐 흑사병이 일종의 ‘축복’이었다. 사람이 귀해지면서 ‘몸값’이 높아졌고, 수중에 넣을 일자리와 재산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족해졌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희소해지면서 대폭적인 임금상승이 뒤따랐다.
흑사병이 발발하기 전에는 ‘찍소리’ 못했을 사회 하층민과 농민들도 어느덧 영주와 지주, 귀족들에게 자신의 몫을 제대로 달라는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사람은 귀해지고, 땅이 흔해지면서 토지 가치가 하락하고 귀족층은 힘이 약해진 반면 임금상승 영향으로 중산층과 사회 하층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14세기 말부터 15세기까지를 후대 역사가들은 잉글랜드 농민들의 ‘황금시대’로 부르게 된다. 실제 당시 농민들의 실질소득은 19세기가 될 때까지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컥스함에서 쟁기질하는 사람은 흑사병 이전에는 1년에 2실링을 받다가, 1349년에서 1350년까지는 7실링을 받았고, 1350∼1351년에는 10실링6펜스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윈체스터 장원에선 임금이 25∼33% 올랐고,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영지에선 임금이 75%나 뛴 것으로 분석된다.
마테오 빌라니는 “인구가 줄면서 1인당 확보한 토지가 늘고 재산이 늘게 됐다”며 “이에 따라 사람들은 마치 예전부터 부자였던 것처럼 옛일을 잊었고 사회 하층민들은 예전에 하던 일을 더 이상 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당시 세태를 한탄했다.
부동산의 소유권 이전도 활발해졌다. 전 유럽에서 대규모로 부동산 주인이 바뀌었다. 19세기 영국의 중세학자 서롤드 로저스는 “페스트의 의미는 토지에 완전한 혁명을 도입한 데 있다”고 평했다.
그 결과, 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장기적인 경제 현상도 목도됐다.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의 경우 1350~1420년 1인당 총생산 증가율이 40%에 달했다. 70년이라는 기간의 평균을 내보면 연간 0.8%의 성장률이다. 이런 ‘높은’ 성장률은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로 1인당 보유 가능한 토지와 자본의 규모가 증가한 데 기인한다.
대참사를 겪은 뒤 유럽인들은 성서 속 심판론에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가파른 경제성장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중세후기 대형 성당과 각종 교회 건물들이 들어서는 데도 일조했다.
그리고 한번 흔들린 사회구조는 이후 지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사회 지배층은 흑사병 발병 이전 상태로 임금 수준을 돌리려고 인위적으로 개입했고, 농민과 임노동자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결국, 위아래가 뒤집히고, 균열이 간 사회에서 계속 등장한 것은 유럽 각지에서 빚어진 각종 반란과 혁명, 그리고 내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