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 이후 다자주의 질서를 이끌었던 세계무역기구(WTO)의 권위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개최된 제12차 WTO 각료회의(MC12)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다행히 이번 MC12에서 회원국들은 WTO 개혁을 골자로 하는 각료선언 채택에 성공했다. 각료선언문 채택은 164개 회원국의 공감대를 이뤄내 2015년 이후 7년 만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WTO 분쟁해결기구는 여전히 기능이 마비돼 있어서 WTO 개혁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도 나온다. MC12의 이모저모를 5개 키워드로 분석했다.
기업들이 가장 싸고 쉬운 공급망보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공급망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자유무역체제에 기반한 세계화가 이제 끝나가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WTO의 분쟁해결기구인 상소기구는 2019년 이후 상소위원 선임이 중단되면서 무력화된 상태다. 이번 MC12에서 회원국은 2024년까지 분쟁해결 시스템을 정상화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상소위원 선임에 미국이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분쟁해결 시스템이 복원될 수 있을지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다자무역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것이 유리하다. WTO체제의 큰 원칙 속에서 각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WTO 분쟁해결기구의 부활 여부는 WTO와 다자주의 무역체제 복원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수산보조금은 수산자원 보호와 환경문제가 결부되면서 쟁점화됐다. 한계상황에 처한 어민에 대한 보조가 과잉 어획능력을 유발해 수산자원의 고갈과 무역환경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이번 MC12에서는 불법어업, 남획된 어종, 자원관리가 없는 공해에 한해 보조금을 금지하도록 회원국들의 합의가 이뤄졌다. 국가별 이견이 큰 유류보조금, 원양어업 대상 보조금, 개발도상국 특혜의 범위와 기간에 대해서는 이번 합의에서 제외하고 후속 협상을 진행하기로 했다. 민감한 주제에 대한 협상을 뒤로 미루는 대신 수산보조금 문제에 대한 최초의 합의를 이루는 데 의의를 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세계 각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휘청거리고 있다. 식량 공급망에도 차질이 빚어져 식량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지금의 식량위기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세계화 후퇴,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세계 농산물 가격 변동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이번 MC12에서도 식량안보 문제가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회원국들은 식량안보 각료선언을 통해 농산물 교역 원활화와 전 세계 농식품 시스템 회복을 위해 불필요한 수출 제한·금지 조치의 자제를 약속했다. 또 식량안보를 위한 각국의 긴급조치가 무역을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투명하게 시행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한국도 전 세계 식량안보를 위해 식량 공급망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고, 식량 상황이 취약한 국가에 대한 원조가 원활히 이뤄지도록 논의에 적극 참여하기로 했다. 다만 이번 각료선언이 식량안보를 위한 공동 노력으로 이어질지는 각 국가의 이행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WTO 회원국들은 개도국에게 향후 5년간 기존 지식재산권협정(TRIPs)에 비해 완화된 요건으로 코로나19 백신 특허의 강제실시 시행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WTO 산하 ‘TRIPs 협정’ 논의는 2020년 10월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가 WTO에 코로나19 관련 의약품 특허권을 일시 유예하는 방안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지난 5월부터는 미국, 유럽연합(EU), 남아공, 인도 등 4개국이 제안한 코로나19 백신 관련 특허의 강제실시 원활화 방안이 제시되며 논의가 진전됐다. 그 결과 WTO는 MC12에서 코로나19 백신 특허의 강제실시를 원활화하는 내용을 담은 각료결정을 채택했다. 팬데믹 극복을 위해 개도국들이 코로나19 백신 특허를 보다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번 MC12에서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 관행(모라토리엄)을 차기 각료회의까지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내년 연말까지 차기 각료회의가 개최돼야 하고, 2024년 3월 31일 이후로 지연될 경우엔 모라토리엄을 종료한다는 전제다.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모라토리엄은 1998년 각료 결정과 그에 따른 ‘전자상거래에 관한 작업계획’이 합의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각료회의마다 이를 연장하면서 지속돼왔다. 하지만 디지털 무역이 본격화되면서 이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됐다. 모라토리엄이 연장되지 않을 경우 WTO체제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합의 결과는 긍정적이라는 평가다. 다만 개도국들의 반발이 지속되고 있으므로 모라토리엄이 종료될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