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블리스 #GMT_그리니치평균시 #80일간의_세계일주

시계의 발명, 그리고 인류의 경제활동
포그 씨가 시간에 집착한 이유는?

13세기 말 ‘시계’라는 기계장치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시계는 ‘대충’ 예배시간을 알리는 데 활용됐을 뿐 사람들은 정확한 시간을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다. 시계가 인간의 삶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였다. 사람들은 시계가 만든 규율에 맞추어 살기 시작하면서 시간에 집착하게 됐고 ‘시간이 돈’인 세상을 맞이하게 됐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주인공 포그 씨가 시간에 집착하는 인물로 묘사된 것도 이런 배경 에서 비롯됐다.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중기과학부 부장 

1873년 프랑스 출신 소설가 쥘 베른이 쓴 모험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
편집증적으로 시간에 집착하는 인물로 묘사된 주인공 포그는 시계 발명 이후의 사회상을 잘 반영한 인물이다.

정확하게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는 근대의 산물이었다. 당연히 초기에는 ‘사치품’ 취급을 받았다. 1797년 영국에선 모든 시계에 세금이 부과됐는데 당시 세리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조세 신고서는 영국 사회에 시계가 얼마나 보급돼 있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피블스란 조그만 마을의 조세 신고서에는 “읍내에는 시계(clock·괘종시계나 탁상시계)가 15개, 은제 회중시계가 5개 있으며 금제 회중시계는 없다. 피블스 읍내와 시골, 교구를 통틀어 시계는 105개, 은제 회중시계는 112개, 금제 회중시계는 35개 있다”는 식으로 꼼꼼하게 세금부과를 위한 기록을 남겨두었다.

‘표준’을 지배한 영국

14~15세기까지만 해도 개인이 시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기계식 시계가 매우 비싸서 공공부문에서 주로 활용했다. 시계가 인간의 삶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이며 배경이 된 장소는 영국이다.
19세기 후반 세계 전역을 지배하던 ‘대영제국’은 세계 각지의 영토뿐 아니라 각종 주요 표준까지 지배했다. 자연스럽게 영국이 세계 측량단위의 기점 역할도 병행했다. 1884년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자오선 콘퍼런스에서 런던 근교 그리니치를 지나는 자오선을 세계 경도의 기준점인 ‘0’으로 삼았다(본초자오선). 각국의 지도 제작자들은 자국의 수도를 세계 중심에 놓던 습관을 버리고 경도에 일련번호를 매기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동의해야만 했다. 영국을 기점으로 하는 지리적 ‘개념’들도 등장했다. 아시아 대륙은 대영제국과의 거리에 따라 근동(近東·the Near East)과 중동(中東·the Middle East), 극동(極東·the Far East)으로 구분됐다.
그리고 이 같은 영국 중심의 기준은 시간 측정에도 적용됐다. 영국 그리니치의 시간이 전 세계 시간을 기록하는 원점(GMT:그리니치평균시)이 됐고,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
사실 서양에선 13세기 말 ‘시계’라는 기계장치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시계는 ‘대충’ 교회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데 활용됐을 따름이다. 사람들은 자연의 주기에 따른 유동적인 시간기준에 의거해 살아갔다. 19세기 중반까지 마을마다 독자적인 시간개념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은 별과 태양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 하지만 이후 시계 보급이 확대되면서 시간을 균질적으로 나누게 됐다. 낮이 긴 여름이나 낮이 짧은 겨울이나 동일한 시간대로 구분되면서 ‘전국’의 시간을 통일하고 그 기준을 잡으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시간을 금으로 만든 시계

19세기 이전에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기에 시계에 분침이 없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는 초 단위까지 정확히 맞출 것을 요구할 정도로 급변했다. 경영자와 관리인, 노동자는 점점 더 시계와 호각으로 규율되는 노동일과에 묶여버렸다. 시간엄수가 장려됐고, 늦으면 벌금이나 해고로 벌을 받아야 했다. 시간은 절약해야 하는 대상이 됐고, ‘시간이 돈’인 세상이 됐다.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 주인공으로 편집증적으로 시간에 집착하는 인물로 묘사된 포그 씨는 이런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이런 상황을 가속화한 것은 철도의 등장이었다. 1845~1847년에는 626개 회사가 승인받은 철도건설 총연장이 1만5,340km에 달했다. 
철도 붐을 타고 기차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거리 개념은 점점 더 좁혀졌고, 전체 시간망을 통일하는 것도 시급해졌다. 철도회사들은 런던 시간을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철길을 따라 늘어선 전신을 이용해서 전국에 시간을 알렸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영국의 사례를 따라갔지만 한동안은 세계 각지의 시간을 맞추는 데 혼란이 이어졌다. 영토가 너무 넓었던 미국은 자국만의 시간대를 따로 정해버렸는데 버펄로역에는 시간이 각각 다른 시계가 3개 있었고, 피츠버그역에는 6개나 있었다.
이런 상황의 해답은 전신망이 제공했다. 국제적 전신망이 확립되면서 각 국가는 시간 측정에 관한 기준 확립에 합의했다. 마침내 전 세계의 시계가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세계 시간의 기점은 영국 그리니치가 됐다.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시간 측정의 기준까지 자연스럽게 장악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은 시간관념의 변화,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시계기술의 발전과 걸음을 같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