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본위제는 경제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금본위제란 금을 국제거래의 결제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거래 방식이 지금의 경제생활과는 맞지 않지만 미국과 중국 간 무역갈등이 환율분쟁으로 확전되면서 금본위제에 대한 향수가 깊어졌다. 역사적으로 금본위제의 탄생 배경과 의미를 짚어본다.
글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중기과학부 부장
오직 금만이 영원히 반짝인다. 아득히 먼 과거부터 금이 지닌 불변의 반짝임은 사람들을 매혹했다. 사람들이 금의 가치를 믿는 한, 금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의미는 흔들리지 않고 유지됐다. 다만, 금은 그 희소성 탓에 ‘화폐’의 주역 자리에선 한발 물러나 있는 기간이 길었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선 오랫동안 은이 주요 가치척도 및 교환수단으로 기능했다. 아나톨리아 고원 주요 광산에서 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의 은이 산출됐고 국제교역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돼서다.
시대가 흐르면서 금이 점점 전면으로 등장했다. 전근대 시기의 은을 기준으로 삼던 문명권은 19세기 들어서면서 급변했다. 결정적 계기는 1859년 미국 네바다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면서 은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진 것이다. 1871년 은본위제를 고수하던 독일이 금본위제로 이행하면서 금대세론은 굳어졌다. 때마침 독일은 보불전쟁의 승리로 프랑스로부터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받아 금본위제 전환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다.
1850년을 전후해 미국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금 가격이 하락했다. 새로운 금광 발견으로 25년간 생산된 금의 양이 이전 250년간 생산된 금의 양과 맞먹을 정도가 됐다. 대형 금광 발견으로 미국과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통용되던 금은양본위제가 쫓겨났다.
이에 따라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 소위 프랑권 국가들이 1870년대 금본위제로 이행했고 미국도 1900년에 금본위제를 채택했다. 1900년이 되면 유럽과 북미, 일본, 아르헨티나까지 주요국이 금에 기반을 둔 화폐체제를 구축했다. ‘고전적 금본위제(the classical gold standard)’가 자리 잡은 것이다.
이때에는 지폐를 통화당국에 들고 가면 언제라도 법이 정한 무게의 순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1914년 이전 영국에선 1파운드당 순금 113.0016그레인(gr)으로 교환됐고, 미국에선 1달러당 순금 23.22그레인의 비율로 태환(convert)됐다. 금 태환성을 보장하기 위해 영국은 1844년 ‘은행허가법’을 제정하고 영국 중앙은행(Bank of England)의 은행권 발행규모를 자신들의 금 보유고에 1,400만 파운드를 더한 금액까지만 허용했다.
독일도 1876년 관련법을 통해 독일제국은행(Reichsbank)이 발행하는 지폐량은 제국은행 금 보유고 및 재무성 증권보유고의 세 배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금에 기반을 둔 안정된 통화체제가 갖춰지면서 세계화가 빠르게 진전되고, 인플레이션 위협이 약해졌다. 금본위제 아래 통화정책은 금의 화폐가치를 유지한다는 준칙에 따라 이뤄졌고, 이 준칙이 잘 지켜지면서 인플레이션 문제가 이후에 비해 훨씬 적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금과 은 모두 생산이 늘었지만 두 금속의 위상이 극과 극으로 달라진 금본위제로의 이행 배경에는 영국의 힘이 있었다. 금의 가치가 지고지선(至高至善)해서가 아니라 최강국 영국이 금본위제를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중세부터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 영국은 은본위제 국가였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중앙은행이 전비 조달에 전력하는 과정에서 은본위제가 폐지되고 1816년 금본위제가 선택됐다. 영국이 금본위제를 실시하자 1870년대 영국의 재정지원을 받고자 하는 많은 나라가 금본위제로 이행을 서둘렀다. 또 이들과 교역을 하던 많은 나라도 불이익을 줄이려고 금본위제를 택했다. 당시 최대 교역국으로 주요 운송국이며 해외자본 수출국이던 영국의 화폐가 사실상 국제 지불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던 점이 배경이다. 하지만 영국을 중심으로 한 금본위제는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흔들리면서 기축통화 자리가 파운드에서 ‘달러’로 넘어가게 된다. 금본위제의 등장과 정착의 역사를 살펴보면 금에 대한 인류의 애착 이면에는 냉정한 현실정치의 역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치권력이 안정될 때에만 금도 제값을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