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통화란 국제거래의 중심이 되는 통화를 말한다. 화폐의 통용과 지불능력을 법적으로 보증하는 법정통화, 익명성을 기반으로 네트워크상에서 통용되는 가상화폐(암호화폐)와는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기축통화국은 역사적으로 세계 패권을 차지해왔다. 이번 글에서는 미국 달러가 기축통화로 채택된 배경과 전망, 시사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글 강준형 도서출판경제21C 대표
1944년 7월, 미 북동부 뉴햄프셔주에 위치한 휴양지 브레턴우즈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후 국제질서 재편과 금융통화제도 논의를 위해 44개국 대표가 모인 이 자리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으니, 영국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미국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다. 케인스야 두말할 것도 없이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로 명성이 높았으며, 화이트 역시 미 재무부 차관보 출신 엘리트 관료였으나 케인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화이트는 승전국, 그것도 미국의 대표였다.
승리는 화이트에게 돌아갔다. 케인스는 방코르(Bancor)라는,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가상화폐에 가까운 초국적 통화를 제안했지만 세계 패권을 곧 움켜쥘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금본위제까지 부정하진 않아, 금 1온스를 달러에 고정시키고 그 대신 각국의 통화가치를 달러에 연동하는 방식으로 기축 통화국 지위를 확립했다. 동시에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을 설립하며 미국 중심의 국제금융질서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패전국이던 독일과 일본은 빠른 회복에 성공하며 경제 규모를 넓혀 나갔고, 미국의 무역수지는 점차 악화됐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위상을 급속도로 추락시키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당초 낙관적 기대와 달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은 막대한 군비조달에 달러를 퍼부었다. 제아무리 기축통화라 한들 급격한 통화팽창을 당해낼 순 없는 일이었다.
기축통화가 필수로 갖춰야 할 조건인 가치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렸다. ‘금 1온스=35달러’의 불문율을 의심하는 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프랑스가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갔다. 이 시기 달러 팽창으로 국제 금 가격은 이미 1온스당 35달러를 훌쩍 넘었다. 이에 너나없이 금 교환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금 보유량이 바닥을 보이자 궁지에 몰린 미국은 금 교환 정지를 선언한다. 바로 닉슨 쇼크(1971)다. 너무나 일방적이고도 갑작스러운 발표에 세계경제는 큰 충격을 받는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이렇듯 허무하게 종언을 고했다. 작게는 기축통화, 크게는 국제금융질서의 축이 다시 유럽을 향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미국은 금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찾는데, 바로 석유였다. 1973년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헨리 키신저는 중동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 몇 차례 논의 끝에 군사·경제 협정을 체결한다. 사우디의 안전은 미국이 보장해줄 테니, 대신 석유 결제 시 달러만을 사용하라는 내용이었다. 석유의 달러화, 즉 ‘페트로달러’ 시대가 새롭게 열린 순간이었다. 이렇게 미국은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회복했으며 1990년대 소련 해체 이후에는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세계경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승승장구하던 미국 경제는 2000년대 들어 다시금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라크 전쟁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대표적이다. 한편 그사이 중국은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했다. 중국의 추격은 비단 실물 경제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 미국이 그랬듯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창립을 넘어 위안화의 특별인출권(SDR) 편입, 페트로위안화 시도 등 달러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여전히 미국의 지배력이 압도적인 것은 사실이나 최근 미·중 무역분쟁의 장기화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촉발된 신냉전 구도 속 중국 위안화의 확대는 우리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부분이다. 단, 이것이 위안화의 기축통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건 아니다. 중국은 기축통화가 되기 위한 조건을 절반도 채우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사회주의라는 중국 체제에 비춰볼 때 외환시장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끝으로 최근 글로벌 고물가 환경 속에서도 달러는 나 홀로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3회 연속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했음에도 연말 5% 수준까지 올리는 것에 별 망설임이 없다. 이미 신흥국은 화폐가치 유지를 위해 무리한 금리인상을 감내하고 있으며 선진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우리 역시 높은 환율로 경제 위축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위기를 조장할 이유는 없으나 다방면에서의 달러 수급 개선 노력이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