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용정 현대경제연구원 산업혁신팀 팀장 사진 한경DB
유럽연합(EU)은 미래산업 주도권 선점을 위한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과 기술경쟁 우위 확보 전략을 추진 중이다. 2010년 ‘통합적 산업정책’ 발표를 시작으로 2020년 글로벌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글로벌 경쟁 대응 및 유럽의 전략적 자립성 확충 요구에 따라 ‘유럽 신산업전략’을 발표했다. 2021년에는 ‘디지털 컴퍼스 2030’ 전략을 마련해 유럽의 디지털 전환을 이행하기 위한 로드맵도 마련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전쟁은 미국, 중국 양국뿐 아니라 첨단기술 산업을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산업정책 기조에 변화를 주고 있다. 특히 코로나19로 산업 간 공급망 이슈가 부각되면서 주요국에서는 자국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부 개입이 정당화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등 미래산업 주도권 선점을 위한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과 기술경쟁 우위 확보 전략은 중장기적인 산업육성 정책 및 우방국들과의 전략적 협의체 구축을 통해 강화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역내 산업경쟁력 확보와 변화하는 산업환경에 적응하고자 2010년 ‘통합적 산업정책(An Integrated Industrial Policy)’을 발표했다. 제조업의 전반적인 혁신과 생산성 증대에 중점을 두면서 청정생산과 디지털 기술의 융합을 목표로 추진됐다. 이 중 유럽 산업 디지털화 정책은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유럽 산업 전반의 가치 창출 방식을 변화시키고, 산업경쟁력을 확보하면서 성장과 고용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2020년 미·중 기술패권 경쟁, 코로나19 등 글로벌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글로벌 경쟁 대응 및 유럽의 전략적 자립성 확충 요구에 따라 ‘유럽 신산업전략(2020 New Industrial Strategy)’을 발표했다. 이는 탄소중립, 디지털 전환 및 새로운 지정학적 맥락에서의 대외의존도 감축 추진을 골자로 하고 있다. 관련 전략은 2030년까지 글로벌 역량 강화와 미래산업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EU의 가장 핵심적인 산업정책 중 하나다. 2021년에는 반도체, 배터리, 의약 성분, 수소 등 6개 전략 분야의 특정국 의존도를 낮추는 자립화 추진 세부계획을 마련했다. EU 상품 교역의 50~60%가 중간재임을 고려한다면 공급망의 취약성을 분석하고 다변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한 모습이다. 특히 원재료, 배터리, 수소, 반도체, 산업데이터, 항공기, 우주로켓 등 7개 분야의 산업 얼라이언스를 지원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약해진 EU의 단일시장 체제를 회복하고, 생산성 강화와 디지털화 및 지속 가능한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목표로 산업정책을 수립한 것이 특징이다. 더불어 산업 자립화를 위한 측면으로 연구와 기술개발뿐 아니라 산업연합체 구성, 규제 및 표준협력 강화, 유럽공동이익프로젝트(IPCEI) 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2021년에는 ‘디지털 컴퍼스 2030(2030 Digital Compass)’ 전략으로 유럽의 디지털 전환을 이행하기 위한 로드맵도 마련했다. 디지털 주권을 확보하고 인간 중심적, 지속 가능한 디지털 미래 구현을 위한 비전에 정책의 목표가 수립돼 있다. 디지털 전환을 위해 EU는 4개 핵심축을 마련했는데 이는 디지털 전문가, 디지털 인프라, 디지털 비즈니스 전환, 공공 서비스의 디지털화를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돼 있다. 2030년까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클라우딩 컴퓨터 서비스를 활용하는 역내 기업의 비중을 75%까지 높임으로써 기업의 디지털 전환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디지털 인프라 측면에서 최첨단 반도체 생산을 통해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점유율을 2020년 10%에서 2030년 20%까지 늘려 반도체산업의 역내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이면에는 치밀한 기술개발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2021-2024)에서는 995억 유로(약 138조 원) 규모에 달하는 연구혁신 프로그램을 구성해 연구혁신 투자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유럽 내 전략산업을 구축하고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응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디지털·산업·우주 분야(153.49억 유로)와 기후·에너지·모빌리티(151.23억 유로) 분야에는 연구개발(R&D) 투자가 집중적으로 마련됨으로써 기후변화와 디지털 시대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EU는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자동차산업과는 별개로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 육성을 위한 움직임이 눈에 띈다. 반도체산업은 국제분업체계를 구축하며 공급망에 취약한 산업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첨단산업 발전으로 반도체 수요 증가에 따른 국가별 공급망 내재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는 양상으로 한국과 미국, 대만, 일본, 유럽이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주도하고 있다. 유럽은 특히 반도체 장비와 일부 소재 부문에 특화돼 있는데, 영국과 독일,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제조장비, 소재, 칩 설계의 핵심 지식재산을 보유하면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EU는 반도체산업의 전략적 자율성 및 첨단 반도체의 생산 역량 강화를 위해 투자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다. 특히 기술적 경쟁력 확보에 집중하는 모습인데 세부적으로 보면 자체 기술 보유, 시장 주도 기술 강화, 제조 역량 확대, 신사업 기회 창출 등을 제고하는 데 역량을 모으고 있다. 첨단 나노공정 생산량을 증산하기 위해 제조 역량을 확대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장비 부문의 경쟁력 지속을 위한 자체 기술 보유를 확고히 한다는 입장이다. 상대적으로 열세로 인식되는 첨단 제조기술과 칩설계 부문과 관련한 유럽 반도체 기업들의 세계 시장 경쟁력 확보와 기술력 제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편 EU가 배터리 산업 육성을 위한 ‘유럽배터리연합(European Battery Alliance)’을 구축한 점이 눈에 띈다. 원자재 및 첨단소재, 셀·모듈, 배터리 시스템, 리퍼포징·재활용·정제 등 4개 분야에 7개국 대표 기업들이 참여했는데 2025년까지 자체 생산이 연간 200GWh에 도달 가능한 설비 구축을 목표로 세웠다. 동시에 2031년까지 EU에서 32억 유로, 민간 부문에서 50억 유로를 공동으로 투자할 계획이다. 이러한 목표의 배경에는 각국의 환경규제가 강화되는 흐름 속에서 향후 유럽에서 판매되는 차량 중 70%가 전기차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자리 잡고 있다. 전기차의 확대는 새로운 형태의 부가가치 및 일자리 창출로 산업 전반의 긍정적인 효과를 유도하고, 탄소배출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산업적 변화다. 배터리산업은 전 세계 70여 개 공장 중 46개 이상이 중국에 있고, 생산 역량은 중국, 일본, 한국 등 3국이 시장의 약 95%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자동차산업과의 연계성이 높은 배터리산업 육성과 자체 생산을 통해 경제·산업적 지속가능성을 실현하는 한편 25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유럽은 국가경쟁력이 첨단산업 선도와 기술력 확보에 있다는 인식 아래 ‘디지털화 촉진’, ‘산업 자립화’, ‘기후변화 대응’을 통해 지속 가능한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유럽이 중장기적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산업군이 우리가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반도체·배터리 산업이라는 점에서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다. EU만의 이익과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정책들이 보다 중장기적인 관점으로 뒷받침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는 향후 단일시장체제 회복을 위한 보호무역조치 확대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염려되는 부분이다. 최근 EU는 그동안 미·중 간 갈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지만, 미국의 ‘반도체와 과학법(Semiconductors(CHIPS) and Science Act)’,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반도체산업 협 의체(Chip4)’ 등과 유사한 형태의 역내 중심적이고 경쟁국에 견제적인 경제안보전략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동시에 인센티브 제공을 통해 제3국의 참여를 유도하는 등 유럽의 추가적인 기회와 이익을 창출하는 데 산업정책 추진이 집중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미·중 사이에서 협력 및 경쟁을 유지하면서 혁신을 바탕으로 한 기술적 자주성을 확보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물자 및 소재에 대한 특정국 의존도를 낮추고 자립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데 혁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산업 자립화 전략을 지속할 전망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대응은 산업경쟁력을 국가 경제성장 및 기술 자국화 등 산업안보의 전략적인 관점에서 제조업 강국으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정부와 기업, 학계의 노력을 집중하는 측면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첫째, 기업의 R&D, 시설투자 등을 위한 세제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전략품목 및 핵심기술에 대한 보호체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반도체산업을 중심으로 미·중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국내 설계 및 생산의 밸류체인(가치사슬) 구축 노력을 통해 산업경쟁력을 지속해서 확보할 필요가 있다.
둘째, 첨단산업의 소재 및 핵심장비 개발 등 기술력 제고가 시급하다. 반도체, 전기차 등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원천인 기초연구 활성화를 위해 연구인력 육성과 글로벌 선도기술 확보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특히 기술경쟁력 제고를 위한 R&D 투자, 실증센터 확대 등을 통해 지속 가능한 산업생태계 구축을 위한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셋째, R&D 인력 양성과 핵심인력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도 절실하다. 첨단산업의 세계 선도를 위해 정부는 기업의 R&D 투자 유도뿐 아니라 정부 및 산학연 협력 모델을 통한 고급인력 육성정책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R&D 핵심인력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 및 관리 시스템 활성화를 검토하고 기술안보를 위한 법·제도적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넷째, 기업은 선제적인 투자 확대뿐 아니라 산업의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경쟁력 강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경쟁력이 열위한 부문을 중심으로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시장점유율 확대 및 기술력 확보를 위해 기업 간 전략적 인수합병(M&A) 등도 도모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고기술·고부가가치 제품에 대한 R&D 투자 확대를 통해 기술력을 유지하고, 디자인, 브랜드 등 비가격경쟁력 제고에도 주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수출시장 다변화와 내수시장 확대를 통해 외부 충격에 강한 경제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특정 국가의 의존도를 낮추고 외부환경 변화에 대한 완충능력 강화가 절실하다. 중장기적으로는 첨단산업 육성 등 경제구조 업그레이드를 통해 성장잠재력을 확충하고 경제활력 제고를 위한 노력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