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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재판의 경제학

실패나 재난의 책임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살기가 팍팍할 때, 생존을 위한 사투가 벌어질 때 책임을 전가할 대상으로 사람들은 ‘마녀’를 찾고는 했다. ‘마녀사냥’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흔히 중세 유럽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상 마녀사냥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기는 근세 초다.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중기과학부 부장

프랑스대혁명 이후인 1798년에 그려진 <마녀들의 만성절>,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17세기 초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가장 격렬하게 발생한 곳은 현재의 독일 지역이다. 당시 독일 지역에는 8,000만 유럽 인구의 5분의 1가량이 살고 있었는데,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유럽 대륙 희생자의 절반가량이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1631년 프리드리히 슈페라는 독일인은 “독일에는 마녀 어머니가 너무나 많다”라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마녀와 관련된 문제에 천착해온 독일의 역사학자 볼프강 베링거는 중부유럽이 마녀 박해의 중심지가 된 이유로 16세기와 17세기 초의 환경위기를 거론한다. 소위 ‘소빙하기’가 닥치면서 인구밀도나 거주구조, 농업구조 같은 사회·문화 인프라와 경제 기반이 가장 취약하던 독일 지역이 큰 타격을 입게 됐다는 설명이다. ‘소빙하기’의 충격은 30년 전쟁(1617~1648)이 벌어진 유럽부터 명·청 교체기의 중국, 병자호란(1636)에 휘말린 조선까지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17세기 위기론’으로 설명되기도 했다.
지역에 따라 충격의 강도는 달랐는데, 지중해 유역이나 기타 해안 지역에선 기온 하강의 영향이 크지 않은 반면 주민들이 밀집해서 살던 유럽 내륙 지역에선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이웃과의 사회적 갈등이 증가했다고 한다. 취약해진 환경의 영향이 이웃을 마녀로 의심하고 몰아붙이는 구조적 문제로 이어진 것이다.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 근교의 어촌 세일럼 빌리지 (Salem Village)에서 벌어진 마녀재판 당시의 모습을 그린 판화. 마을 소녀들이 발작과 이상 행동을 보이자 마녀의 소행이라며 몇 개월에 걸쳐 광기 어린 마녀 재판이 진행된 끝에 30명이 죽임을 당했다.
삶이 팍팍해지면 다 마녀 탓

농업사가 빌헬름 아벨의 연구도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1670년 ‘기아 위기(Hungerkrise)’에 관한 연구에서 소빙하기 중앙유럽의 물가상승은 서유럽이나 남유럽 도시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날씨는 추워지고 우박·서리 등의 피해는 늘고, 여름이 짧아지면서 자연스레 흉년이 늘어 농업 생산량 축소가 미친 영향이 컸다.
흉년이 자주 반복되면서 식량부족이 다시 기존 사회질서의 존속을 위협하는 사회적 긴장을 키우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주민들의 영양상태가 나빠짐에 따라 전염병이 확산하면서 모든 책임이 ‘마녀 탓’으로 돌려질 수 있었다. 결국 이런 위기의 책임이 사회나 조직, 정치체 등 기관의 탓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개인 탓으로 옮아가면서 기존 공동체에서 약자로 분류되든가, 아니면 질시의 대상인 존재들이 마녀로 몰리면서 마녀사냥의 광풍이 일었다. 무엇보다 혼자 사는 여성이 마녀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텍사스대학 역사학자 브라이언 르박에 따르면 근세 초 유럽의 마을공동체에서 혼자 살던 여성들은 보통 가난한 사회 최하층으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대표했다. 그랬던 만큼 그들은 자주 마녀사냥의 공격 대상이 됐다. 또 ‘마녀=여성’이라는 인식으로 사회 약자였던 여성은 더더욱 마녀로 몰리기 쉬웠다. 실제로 자신마저 ‘마녀’로 몰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남편이나 자식들이 아내나 어머니를 마녀로 몰고 본인은 위험을 회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미국 세일럼 빌리지의 마녀사냥

유럽 무대를 벗어나 식민지 시절 미국 뉴잉글랜드 매사추세츠주에서도 비슷한 양상의 움직임이 관찰된다. 세일럼이라는 마을에서는 1692년 300여 명이 마녀로 몰렸고 30명이 처형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같은 마녀사냥의 배경에는 농업 종사자와 상업 종사자 간 갈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역 재산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던 중 세력이 약화하던 농업 지주들이 예전의 권능을 되찾기 위한 심리적 무기로 마녀사냥을 들고 나왔다는 게 역사가들의 설명이다. 특히 역사가들은 마녀로 몰린 대부분의 사람이 여성이고, 이들 중 상당수는 기존에 전통적으로 부여되던 여성 역할을 거부하거나 역행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 마녀로 몰린 대부분의 여성은 중산층이거나 아들 또는 남자 형제가 없는 중년층이었다. 그들은 적잖은 재산을 상속받아 독립된 삶을 살던 부류였지만 그 재산과 상대적으로 약한 사회적 방어막 때문에 손쉬운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됐다. 경제 상황이 어려워질 때마다 사람들은 어려움에 대해 책임을 전가할 질시와 두려움의 대상을 찾는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전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