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史 큐레이터

동서 이어주고 남북도 이어준
섬유 무역사(史)

박정준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통상전략센터 선임연구원 사진 한경DB

의식주(衣食住)라는 말이 있듯이 먹는 것, 사는 곳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입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섬유원료의 대표는 바로 비단과 목화다. 비단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를 닦았고, 목화는 미국 남북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가 이후 미국을 하나로 묶었다. 비단과 목화 관련 섬유 무역이야기의 첫 페이지는 시작이 알려지지 않은 먼 옛날이다. 무려 기원전이다.

인류 최초의 옷이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를 떠올려 나뭇잎이라는 의견이 있다. 따지고 보면 목화와 마찬가지로 식물성 섬유원료다. 반면 역사를 돌아볼 때 더 익숙한 것은 역시 동물가죽, 새 깃털 같은 동물성 원료다. 돌도끼를 들고 털가죽을 구릿빛 피부에 휘감은 원시인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동물 복지 관점에서 절대 이상적이지 않지만 지금도 고부가가치 섬유원료로 각광받는 모피를 우리보다 훨씬 먼저 원시인들이 향유했던 셈이니 정말 패션은 돌고 도는 게 분명하다. 또 다른 인기 원료 중 하나인 양털도 동물성이다. 호주와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미국에서 주로 생산, 수출하지만 그중 전 세계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호주산은 최고급으로 사랑받는다. 뽕잎을 먹은 누에가 토한 실로 만드는 견직물(누에고치에서 얻은 실로 짠 물건)의 하나인 비단 역시 단백질이 많이 포함된 천연 동물성 섬유다.

동서가 하나로, 실크로드(Silk Road)

누에가 고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토해내는 실이 재료인 비단은 기원전부터 중국이 독점 생산하던 귀한 상품이었다. 누에의 집이자 옷을 벗겨 인간의 몸을 덮는 게 미안하지만 그 어떤 옷감보다도 촉감이 좋고 인체 피부와 유사한 성분 덕에 편했던 탓이다. 중국이 비단 제조법을 아주 엄중하게 관리했음은 물론이다. 지중해 통일을 이룬 고대 최대의 로마제국은 이러한 비단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비단을 사기 위한 막대한 은 유출로 제국 경제가 악화되었다는 말이 있다. 바로 이때 중국에서 유럽으로 비단이 수출되어 팔려가던 그 길이 인류 최초의 동서양 교역로라는 비단길, 즉 실크로드다.
6세기 들어 뽕나무의 종자와 누에의 알이 비잔틴 제국에 전해지고 십자군 원정을 거치며 12, 13세기에는 유럽에서도 비단이 본격적으로 생산됐다. 수요-공급 원칙이라는 경제학 기본 이론에 따라 비단의 가치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가 비단 생산의 중심지로 부상했는데 프라다(Prada), 구찌(Gucci) 등으로 유명한 현지 명품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닌 것 같다. 이탈리아 장인들의 선조는 일찌감치 비단의 매력을 알아본 눈썰미의 소유자였다.

목화씨는 문익점

1991년 발표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2절은 남북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위인들을 노래하는데 여기서 일편단심으로 유명한 정몽주 다음 등장하는 가사와 인물이 바로 ‘목화씨는 문익점’이다. 진위 여부에 조금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원나라로 귀양을 가 있던 문익점이 돌아오는 길에 당시 수출금지 품목(금수품목)인 목화씨를 붓두껍(붓촉에 끼워두는 뚜껑) 속에 숨겨왔다는 이야기가 정설이다. 바로 이 목화로 만든 면을 직물로 짜면 무명이 되는데 조선시대에 흰색 무명옷이 우리를 상징하는 하나의 의복 문화가 되어 이른바 백의민족(白衣民族)이란 별명이 탄생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시작에 14세기 고려 말 외교관의 밀무역(密貿易)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아주 흥미롭다. 오늘날의 세관 엑스레이 판독실이 당시에도 있었다면 아마도 역사는 달라졌을 거다.

산업혁명과 섬유의 상관관계

17세기 무명은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보통 인도에서 수입했다. 인도산 무명의 품질이 워낙 좋아 영국 모직물(털실로 짠 물건) 산업이 피해를 보자, 영국은 인도산 무명에 대해 수입금지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일종의 보호무역 정책으로 현대판 세이프가드다. 그 대신 재료인 목화만을 수입해서 면직물(목화솜으로 짠 물건)을 국내생산 방식으로 전환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영국에서는 방적기 등이 개발됐고 결국 대형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18세기 산업혁명의 단초가 마련됐다. 역설적으로 인도 면직물 산업은 주요 수출시장을 잃은 것은 물론 경쟁자 등장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남북이 하나로, 미국의 남북전쟁

핵심 재료인 목화가 대량으로 필요했던 영국이지만 재배에 적합한 따뜻한 온도 등을 고려할 때에 유럽 생산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때 눈에 띈 새로운 목화재배지가 바로 신대륙 미국이다. 특히 미국 남부는 이후 목화 생산과 수출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고 평가될 정도로 목화 재배의 수혜를 봤다. 필요한 일손은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노예들이 채웠다.
문제는 국내 산업 간 이해관계에서 터졌다. 남부와는 달리 공업 중심으로 발전하던 북부는 이익 보호를 위해 영국산 공산품에 고율 관세 부과의 수입장벽을 쌓았다. 그러자 보호무역이 확산되면서 자유무역이 중요했던 남부는 목화 수출에 어려움을 겪었고 깊어지던 갈등은 결국 두 지역 간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다. 남북전쟁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인데 촘촘하게 짜인 직물처럼 미국 역사의 획을 그은 다양한 장면들이 얽히게 된다. 당시 16대 대통령 링컨은 1863년 노예 해방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이 됐고, 미국의 인권도 신장됐다. 그리고 비로소 미국의 남과 북도 진정 하나가 됐다. 실크로드부터 문익점, 산업혁명,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그리고 링컨까지 긴 호흡의 섬유 역사는 옷감을 짜기 위해 길게 풀어놓은 실과 비슷하다. 섬유 무역사(史)가 곧 섬유 무역사(絲)다.

참고 : 물건으로 읽는 세계사(미야자키 마사카츠, 2018),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이나가키 히데히로, 2019), 세계사를 바꾼 12가지 신소재(사토 겐타로, 2019) 및 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