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남미는 한국과 가장 오랜 인연을 맺어온 지역 중 하나다. 1905년 4월, 일제강점기의 설움과 가난을 피해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 1033명의 조선인. ‘애니깽’이라 불리던 멕시코 유카 탄반도 에네켄(용설란) 농장에서 그들이 뿌린 땀과 눈물은 중남미 한인 사회의 뿌리가 됐다. 이후 쿠바·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 등지로 이어진 이민 여정은 우리에게 중남미를 단지 ‘먼 타국’이 아닌 ‘함께 살아온 땅’으로 만들어 줬다.
중남미는 한국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진심 어린 연대를 보여준 소중한 이웃이기도 하다. 콜롬비아는 5062명의 전투병을 파병했고, 약 10만 명의 멕시코인과 멕시코계 미국인이 미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포함한 10여 개 국은 의약품과 식량, 의류를 보내 한국을 도왔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자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협력의 주체로 성장했다. K팝과 K푸드 등 한류는 중남미에서 1000만 명이 넘는 팬을 사로잡고 있다. 중남미는 이제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한국의 동반자다. 미국·중국·유럽연합(EU) 같은 전통적 강대국만큼의 영향력은 아닐지라도, 한국 또한 중남미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해 2월, 중남미 국가 중 유일한 미수교국이었던 쿠바와 외교 관계 수립에 이어, 올해 1월에는 주쿠바 한국대사관이 공식 개관되며 양국 관계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통상 측면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을 시작으로 페루, 콜롬비아, 중미 5개국(파나마·코스타리카·온두라스·엘살바도르·니카라과)과 FTA가 잇따라 발효됐다. 남미 최대 시장인 메르코수르1)와도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코이카)은 중견국 협의체(MIKTA), 카리브공동체(CARICOM) 등 다자 플랫폼을 통해 네트워크를 강화하며, 중남미 지역에서 ‘신뢰 기반 실용 파트너’로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필자는 지난 3월 중 남미 4개국을 방문해 직접 보고 느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중남미 개발 협력과 통상 전략의 접점을 다섯 가지 시각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첫째, 거리보다 ‘구조’를 읽어야 한다.
중남미 국가는 빈부 격차, 기후변화, 산업구조 전환 지연, 불법 이민 문제 등 복합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특수성과 함께 지역 차원의 구조적인 맥락을 종합적으로 읽고 대응해야 한다. 브라질과 멕시코 등 대국 중심의 전략과 더불어 파라과이, 볼리비아, 과테말라 같은 중소국 대상의 차별화된 맞춤형 협력을 병행해야 한다. 코이카는 페루·파라과이·볼리비아·콜롬비아 등 다양한 협력국과 함께 ‘개발’ ‘기후’ ‘디지털’ 3대 격차 해소를 목표로 지역 통합적 협력 기반을 다져가고 있다. 일례로 멕시코의 ‘셈브란도 비다(Sembrando Vida·중미 지역 내 대규모 유실수 조성 사업)’ 프로그램은 중미 및 카리브해 국가를 대상으로 농촌 개발과 이주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지역 차원의 공동 노력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코이카는 중남미가 당면한 구조적 문제 해결에 있어 삼각 협력 또는 양자, 다자 협력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
둘째, 중남미는 숫자보다 ‘신뢰’를 중시한다.
중남미 각국의 개발 전략은 단순히 수치로만 설명할 수 없다. 페루의 지속 가능한 개발 전략, 멕시코 경제 허브 도약 구상, 아르헨티나 자원 기반 성장 계획, 콜롬비아 에너지전환 정책 등은 각국의 역사·정치·사회적 맥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코이카의 개발 협력은 단순한 기술 전수나 일방적 지원이 아니라 협력국의 경제·사회적 수요를 반영한 맞춤형 협력을 지향한다. 예를 들어 페루 정부는 코이카와 협력을 계기로 조선 및 반도체 산업 분야까지 협력 확대를 요청한 바 있는데, 이는 코이카의 대중남미 협력이 단순 개발 협력에 머물지 않고 신뢰 자산으로 축적돼, 산업 협력까지 직접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고유의 속도와 리듬을 존중해야 한다.
중남미 각국의 정책 우선순위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브라질은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 칠레는 그린 수소 전략, 멕시코는 북미 생산 기지 구상에 중점을 둔다. 이는 각 나라의 고유한 경제·사회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은 이를 존중하며, 각국의 정책 리듬과 속도에 맞춰 협력을 조율해야 한다. 필자는 지난 3월 중미 지역을 중심으로 에너지·도로·철도뿐만 아니라 항공우주 같은 첨단 기술 분야까지 협력이 확장되고 있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중남미가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닌, 속도와 리듬에 맞춰 미래 산업을 공동 구축하는 전략적 파트너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넷째, 협력의 본질은 프로젝트가 아닌 ‘사람’이다.
코이카는 봉사단 파견, 연수 사업, 인재 양성 등 사람 중심의 협력을 병행하며 현지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려 왔다. 특히 중남미 출신 연수생 네트워크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양국 관계의 가교로 기능하고 있다. 3월, 장원삼 코이카 이사장이 중남미 순방 중 예방한 베르나르도 아레발로 과테말라 대통령은 한국이 성공적으로 산업화 전환을 이룬 점을 높이 평가하며, 경제개혁을 위해 도로·철도·공항·항만 등 인프라를 확충하는데 한국과 협력을 희망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협력을 넘어 신뢰와 공감을 기반으로 한 장기적인 관계 구축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다섯째, 지속 가능한 협력은 ‘공정한 거래’에서 출발한다.
중남미가 보유한 석유, 가스, 리튬, 바이오 에너지 등 다양한 자원은 한국의 산업 안정과 에너지전환 전략에 필수적인 요소다. 그러나 자원 협력은 단순히 원자재 수입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기술이전, 현지 인재 양성, 고부가가치 창출이 함께 이루어질 때 지속 가능한 상생 협력이 가능하다. 한국은 지난해 페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2) 정상회의에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기반으로 한·페루 양국 관계 강화를 위한 공동 선언문을 채택했다. 국방, 방위산업, 광물자원, 기술, 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이 선언은 양국의 공정하고 상호 호혜적인 협력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중남미는 더 이상 단순한 일방적 원조 수혜 대상이 아니다. 유카탄반도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이민 1세대가 뿌린 씨앗과 오늘날 ‘비바 코리아!’를 외치며 한국 문화와 가치를 열정적으로 수용하는 중남미 청년의 모습은 한·중남미 관계의 역사와 깊이 그리고 미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코이카는 그 중심에서 과거의 인연을 현재의 협력으로, 나아가 미래의 자유, 평화, 번영으로 이어가기 위해 개발 협력과 통상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공적개발 원조(ODA) 사업을 넘어 한때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의 독특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과 중남미 국가 간 개발 협력과 통상 협력에 두루 기여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것이다.
- 1 메르코수르(Mercosur)
남미 공동 시장으로도 불리는 라틴아메리카 경제협력체. 1991년 3월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협의를 통해 설립됐으며, 같은 해 11월 운영을 시작했다. 본부는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 있으며, 정회원국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볼리비아 등 5개국. 베네수엘라는 2016년 12월 회원 자격이 정지됐다. 회원국 간 무역에서 90% 품목에 대해 무관세를 적용하고 있다.
- 2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전 세계 인구의 약 37%, GDP 약 61%, 교역량 약 49%를 점유하는 세계 최대의 지역 협력체. 1989년 호주 캔버라에서 한국 등 12개국 간 각료 회의로 출범. 1993년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제안으로 정상회의로 격상됐다. 회원국은 21개국으로, 한국은 2005년 부산 정상회의에 이어 2025년 정상회의를 경주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