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를 관통한 화두는 보호무역이었다. 이를 촉발한 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였다. 고질적인 무역적자를 줄이려는 포석으로 해석되었다. 국제 정치·경제의 맞수로 등장한 중국을 겨냥해 관세 포문을 열면서 동시에 거대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중국도 맞대응에 나서면서 G2 간 글로벌 무역 전쟁이 달아올랐다.
올해는 글로벌 통상 분쟁이 조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많다. 무엇보다 미·중 간 주고받던 관세 폭탄이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연초부터 글로벌 교역량이 조금씩 회복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복병은 유럽연합(EU)이다. 미국이 EU를 무역 전쟁의 새로운 ‘타깃’으로 지목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수년간 끌어온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가시화하면서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영국이 EU라는 단일시장의 품을 떠나는 건 50여 년 만이다. 2016년 6월 영국 내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극적인 드라마가 여러 번 연출됐다. 자국 내 여론이 엇갈렸다. 결국 국민투표 이후 3년 7개월 만에 영국이 홀로서기에 나서면서 국제 경제사(史)가 새로 쓰이게 됐다. 다만 모든 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영국과 EU는 올해 말까지 새로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양측이 적극적 협상에 나서야 하는 건 물론이다. 이른바 ‘브렉시트 전환기 협상’이다.
이 협상에서 영국이 EU 관세 동맹에 어느 범위까지 잔류할지, 두 지역 간에 새 FTA를 어떤 방식으로 체결할지, 안보 및 외교정책 협정을 체결할 것인지, 시민권 등 외국인의 지위와 노동권·환경 규범 등을 어떻게 짤 것인지 등 결정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영국이 지고 있는 EU 부채 등 재정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협상 기간 중 영국은 EU 회원국 지위를 유지하면서 회원국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동일하게 갖게 된다. 다만 많은 주제를 놓고 지루한 공방을 벌여야 한다는 점에서 연말까지라는 협상 시한은 촉박한 편이다.
영국 내 스코틀랜드의 반발도 변수다. 스코틀랜드는 2016년 국민투표에서 EU 잔류를 선택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영국이 EU를 떠난다면 우리는 영국을 떠나겠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상황에 따라 영국과 EU가 완전히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브렉시트가 시행되는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브렉시트의 불확실성이 작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는 얘기다.
올해 미국이 EU를 상대로 본격적인 무역 전쟁의 포문을 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거대 경제체제 간 갈등 가능성이란 점에서 글로벌 교역에는 부정적 요인이다.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하기 위해선 혈맹 국가에도 ‘계산서 들이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일을 상대로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미국이 EU와 갈등을 빚을 만한 이슈는 적지 않다. 디지털세를 비롯해 탄소 국경세, 개인정보보호법, 항공기 보조금 등이 대표적이다. 프랑스가 작년 말 디지털세 부과 방침을 밝히자 미국은 연 24억 달러 규모의 보복관세 예비 품목(63종)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영국, 오스트리아 등도 디지털세 도입을 예고했다. 디지털세는 법인세와 별도로 애플·구글·아마존·페이스북 등 정보기술(IT) 기업의 디지털 매출에 매기는 세금이다.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철강·석유화학 기업들이 EU에 제품을 수출할 때 부과하는 탄소 국경세도 미국과 EU의 갈등에 기름을 부을 수 있는 소재다. 전통적으로 개인정보와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선호해온 미국으로선 디지털세, 탄소 국경세 등 일종의 무역 장벽을 높이려는 EU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한 양자 간 FTA를 우선순위에 놓고 있다. EU와도 개별적인 FTA를 맺고 싶어 한다. 양자 협상 진척이 신통치 않으면 언제든 다양한 압박 수단을 쓸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에 대해선 이미 무역확장법 232조 적용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EU의 불공정무역관행에 대해 포괄적인 ‘슈퍼 301조’를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 등 개별 품목에 대해 232조를 적용하기보다 여러 분야를 묶어 301조를 적용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거대 경제협력체인 EU는 우리나라와는 핵심 교역국이다. 우리나라는 작년 기준으로 총 528억 달러어치를 EU에 수출했다. 중국(1,362억 달러), 미국(734억 달러), 아세안(951억 달러)에 이어 4위 규모다. EU에서 수입한 금액도 558억 달러에 달한다. 역시 전체 4위다. 우리나라의 대(對)EU 적자 폭은 연간 30억~40억 달러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자동차, 선박, 해양구조물 등이다. EU에서 수입하는 품목은 원유, 자동차, 의약품 등이다.
브렉시트 역시 우리나라의 무역 환경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영국이 EU에서 두 번째로 큰 우리의 교역 상대국이기 때문이다. 작년 기준으로 한국과 영국 간 교역 규모는 총 131억7,000만 달러였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다.
브렉시트 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주요국 중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브렉시트에 따른 우리나라의 실질 GDP가 2033년까지 누적 기준 3.1%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영국과의 직접적 교역뿐 아니라 EU 내 현지 공장에서 영국으로 수출하는 상품도 감소할 수 있어서다.
다만 브렉시트 현실화에 따른 교역 악화가 빠른 시일 내에 가시화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EU와 체결한 FTA 수준으로 한·영 FTA 협상이 마무리돼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