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위기의 WTO 상소기구,
갈등과 분쟁 해결의 묘안

곽동철 국제학박사,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센터 과장 사진 한경DB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 현재 WTO 내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WTO 상소기구 개혁방안을 비교 분석해보고 대안적 분쟁해결제도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우리 정부가 WTO 상소기구 개혁을 논의하는 다양한 협의체에 참여하여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본다.

세계무역기구(WTO) 내 대법원 역할을 하는 상소기구(Appellate Body)의 기능이 2019년 12월 11일 정지되었다. 하급심인 패널(Panel) 판정 이후 상소된 분쟁사건을 심리하기 위해서는 최소 상소기구 상임위원 3인으로 이루어진 재판부가 구성되어야 한다. 총 7인의 상소기구 상임위원 중 6인의 위원이 퇴임하였지만 신규 위원이 선임되지 않아 2020년 4월 현재까지 상소기구는 개점휴업 상태다. 도하개발어젠다(도하라운드)의 실패로 WTO의 무역협상 기능이 유명무실화되고 WTO에서 유일하게 활발히 작동하던 상소기구도 사건을 심리하지 못하게 되면서 1995년 설립 이후 WTO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WTO 상소기구 위기의 배경

현재 WTO 상소기구가 처한 위기의 배경에는 상소기구에 대한 미국의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미국의 불만은 2016년, 장승화 WTO 상소기구 위원의 연임 거부를 통해 공식화되었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는 장 위원이 과거 분쟁사건에서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장 위원의 연임을 반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상소기구 위원의 연임을 미국이 거부한 사건은 WTO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고 WTO 전복행위와 같다고도 평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에도 상소기구의 구조적 문제점을 WTO 회원국이 외면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압박의 수단으로 2017년 중반부터 신규 상소기구 위원의 선임을 지속적으로 거부해왔다. 미국의 반대로 새로운 상소기구 위원이 선임되지 못했고 이는 결국 상소기구의 기능 마비로 이어졌다. 상소기구 위원을 임명하려면 현재 WTO 회원국인 164개 나라가 전원 동의해야 한다. 한 나라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임명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상소기구가 내린 일련의 판정을 미국 행정부가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데서부터 상소기구의 불신이 비롯되었다고 분석한다. 특히 미국 행정부가 취한 무역구제조치(반덤핑, 상계관세, 세이프가드)에 대해 상소기구가 불리한 판정을 수차례 내림으로써 국내산업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미국 행정부의 무역구제 권한이 과도하게 제한받는다는 불만이 팽배했다. 또한 중국 정부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시정하는 데 WTO 분쟁해결제도가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불만도 미국 행정부 내에서 꾸준히 이어졌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중국 견제전략으로 WTO보다 1974년 무역법 제301조나 1962년 무역확장법 제232조 등 일방적 보복조치를 활용하는 빈도를 높여가고 있다.

미국이 제기하는 WTO 상소기구의 문제점과 개혁방안
미국의 주장
① 상소심 90일 이내 완료 의무화가 필요하다.
② 위원 임기를 진행 중인 사건의 상소심 완료 때까지 연장하는 관행은 개선해야 한다.
③ 상소된 법적 쟁점에 대해서만 심리해야 한다.
④ 분쟁 당사국이 제기하지 않는 쟁점에 대해 판결해서는 안 된다.
⑤ 선례구속을 주장하는 상소기구의 견해는 월권행위다.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제기되어온 상소기구에 대한 미국의 불만은 2020년 2월 미국무역대표부(USTR)의 심층보고서1)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현재 상소기구가 처한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USTR 보고서에 나타난 상소기구의 주요 문제점과 데이비드 워커 WTO 일반이사회 의장이 주도하여 WTO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소기구 개혁방안을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미국 정부는 상소기구가 90일 이내에 상소기구 보고서를 회원국에게 제출해야 함에도 이를 따르지 않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비판한다. 상소심 절차가 지연되면서 분쟁이 신속히 해결되지 못하고 결국 불법적인 조치로 인한 피해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WTO 차원에서는 상소기구에 상소심을 90일 이내에 완료할 의무를 부과하고, 분쟁 당사국이 동의하는 경우에만 상소심 기한을 연장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둘째, 임기가 만료된 상소기구 위원의 임기를 진행 중인 사건의 상소심이 완료될 때까지 연장해온 상소기구의 관행도 미국 정부의 주된 불만 사항이다. WTO 회원국의 동의 없이 상소기구가 독자적으로 상소기구 위원의 임기를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특히 퇴임 상소기구 위원의 임기를 연장하는 관행으로 인해 이들에게 회원국의 승인 없이 막대한 금액이 보수로 지급되는 행태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이에 워커 의장은 기존 위원이 퇴임하기 180일 이전 신규 위원의 선임절차가 자동적으로 개시되도록 의무화했고 임기 내에 구두변론이 이루어진 경우에는 상소기구 위원이 퇴임 이후에도 해당 사건을 심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셋째, 미국 정부는 상소기구가 패널이 완료한 사실관계는 검토할 수 없고 상소된 법적 쟁점에 대해서만 심리해야 하는 명백한 규정이 있음에도 자의적으로 상소심의 범위를 넓혀 사실관계까지 판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상소기구의 잘못된 사실판단으로 분쟁 당사국들이 불필요하게 국내법을 폐지하거나 개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등 문제점이 드러났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선 다수 WTO 회원국이 공감했으며 WTO에서도 사실판단은 상소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2019년 8월 1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의 세계무역기구(WTO) 탈퇴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넷째, 미국은 분쟁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 불필요한 쟁점에 관해 상소기구가 권고적 의견(Advisory Opinion)을 제시함으로써 분쟁해결제도의 신뢰도가 약화되고 상소심 판결이 지연된다고 지적한다. 명시적인 법적 근거 없이 상소기구가 권고적 의견을 통해 협정을 해석하거나 간접적으로 법을 제정한다면 이는 월권행위라는 지적이다. 워커 의장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공감, 분쟁 당사국이 제기하지 않은 쟁점에 대해 상소기구가 판결해서는 안 되며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제기된 쟁점을 심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상소기구 간 견해대립이 가장 극명한 쟁점 중 하나가 바로 상소기구 보고서의 선례구속 인정 여부다. 상소기구는 상소심의 판결이 선례로서 구속력이 있으므로 하급심인 패널도 상소기구가 행한 법적 해석에 구속된다는 입장이다. 반면 미국은 협정을 해석하는 독점적인 권한은 회원국이 보유하고 있고 선례구속을 주장하는 상소기구의 견해는 월권행위에 해당한다고 비판한다. 현재 WTO 내에서는 미국의 견해를 수용하면서도 법적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개혁 논의가 진행 중이다.
WTO 차원에서 상소기구 개혁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상소기구 신규 위원의 선임을 거부하는 미국의 입장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미국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상소기구 기능 정지는 상당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WTO 분쟁해결제도는 다자무역체제의 ‘왕관의 보석’에 비유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상소기구 위원 선임을 반대해 시작된
상소기구의 위기로 다자무역체제의 근간인 법의 지배가 위협받고 있다.

대안적 분쟁해결제도의 모색
대안적 분쟁해결제도
① 중재절차를 활용하는 방안
② 패널 판정을 최종심으로 확정하는 방안
③ 분쟁해결제도 이원화 방안
④ 제소국이 일방적 보복조치를 시행하는 방안

상소기구의 기능 마비가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되자 대안적 분쟁해결제도를 모색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중재(Arbitration)를 활용하는 방안, 패널 판정을 최종심으로 확정하는 방안, 일반적인 사건과 무역구제에 관련된 사건으로 분쟁해결제도를 이원화하는 방안, 상소기구가 구성되지 못하여 더 이상 재판이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제소국이 일방적 보복조치를 시행하는 방안 등이 대표적이다. 가장 현실적이고 많은 회원국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은 중재절차를 활용하는 방안이다. 상소기구의 기능이 회복될 때까지 WTO 회원국 간에 중재약정을 체결해 중재재판부를 구성하면 상소기구의 역할을 잠시나마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유럽연합(EU)의 주도로 EU를 포함한 16개국2)이 상소기구의 기능을 대체하기 위해 다자 임시 상소중재약정(Multi-Party Interim Appeal Arbitration Arrangement)을 마련하였다.

공개된 약정 초안에 따르면 임시 상소중재제도는 기존 상소기구와 유사하게 운영되며 10인의 중재위원단 목록에서 3명이 순차적으로 선택되어 분쟁을 심리하게 된다. 최종 중재판정은 분쟁 당사국에 대해 구속력을 가지며 WTO에 보고되지만 상소기구 보고서로 채택되진 않는다.
다자 임시 상소중재약정은 16개국 간 분쟁사건에만 적용되고 우리나라, 미국, 일본 등 주요국이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 효과가 제한적이다. 하지만 향후 상소기구 불능화 상태가 지속되면 더 많은 국가가 EU와 뜻을 같이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도 분쟁해결제도를 자주 사용하는 국가인 만큼 동 약정에 참여하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요인을 고려하여 우리 정부도 하루빨리 대안적 분쟁해결제도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월, 다보스포럼을 계기로
호베르투 아제베두 WTO 사무총장과 면담을 갖고 상소기구 정상화와 WTO 개혁방안 등을 논의했다.
갈림길에 선 WTO와 우리의 대응

국가 간 통상갈등을 법에 기초하여 평화롭게 해결하는 WTO 분쟁해결제도는 다자무역체제의 ‘왕관의 보석’에 비유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상소기구 위원 선임을 반대해 시작된 상소기구의 위기로 이제는 다자무역체제의 근간인 법의 지배가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WTO로 대표되는 다자무역체제는 과거로 후퇴할 것인지 미래로 발전해나갈 것인지 결정되는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하였다. 회원국들이 분쟁해결제도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발전적인 해결안을 도출한다면 다자무역체제는 더욱 공고해질 수 있다. 그러나 상소기구 위원의 충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상소기구의 개혁도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분쟁해결제도는 과거 힘이 지배하던 시절로 회귀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리와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정부는 상소기구 개혁을 논의하는 다양한 협의체에 참여해 WTO 분쟁해결제도가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홍보하고 상소기구의 기능 회복과 법에 기반한 다자무역체제의 중요성을 적극 주장해야 한다. 또한 EU가 주도하는 다자 임시 상소중재약정에 조속히 참여하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무역 상대국에 일방적 보복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국내 법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도 있다.

1) United State Trade Representative (2020), Report on the Appellate Body of the World Trade Organization, United States Trade Representative, February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