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동호 중앙일보 논설위원 사진 한경DB
미·중 무역전쟁이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격화됨에 따라 양국 간 견제와 대립이 무역전쟁 2라운드 전초전 양상을 띠고 있다.
미국은 이미 중국의 반도체 기술 확보와 동맹국 교류 차단에 나섰다. 이에 대응하는 중국의 대응 역시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반도체 기업뿐만 아니라 산업계 전반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이에 미·중 간 갈등 현황과 이를 둘러싼 주변 정세를 살펴보고 글로벌 시장질서에 미치는 영향과 한국의 대응전략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본다.
뉴욕타임스(NYT)는 “코로나 사태 이후 미·중 양국이 신냉전으로 향하고 있다”라면서 무역·기술·외교에 걸쳐 전면전이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공세는 크게 두 방향에서 이뤄지고 있다. 첫째는 중국의 반도체 기술 확보 차단이고, 둘째는 동맹국과 중국의 교류 차단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14일 미 매체인 폭스비즈니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중국은 코로나19를 원천 봉쇄할 수 있었지만 통제하지 못했다”라며 “중국과 모든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라고 포문을 열었다. 미국은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태로 극도의 분열을 겪고 있지만 중국에 대한 공세와 관련해서는 국론이 하나로 똘똘 뭉쳐 있다. 중국에 대한 비호감이 66%(퓨리서치센터)로 치솟으면서 의회의 중국 때리기 공세도 잇따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이자 중국에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는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은 ‘코로나19 책임법’을 발의했다. 중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발병원인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면 미국 내 중국 기업의 자산 동결, 중국인 입국 제한과 비자 철회 등 강력한 제재가 가능하다.
같은 공화당이지만 트럼프의 앙숙이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미국 내 희토류 산업 부흥을 위해 관련 기업에 세제 지원을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대상 희토류는 전자제품에 쓰이는 17종의 희귀광물이다. 세계 1위 희토류 생산국인 중국은 광물자원을 국제 분쟁의 무기로 쓰고 있다. 나아가 미 정부는 연방공무원퇴직연금(TSP; Thrift Saving Plan)의 중국 주식 투자 금지를 지시하는 등 중국 기업의 돈줄 차단에도 나서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은 동맹국 결속에 나서고 있다. 당장 영국은 화웨이의 5세대(5G) 이동통신장비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고, 호주는 중국에 대한 수출의존도가 34%에 달하지만 코로나19의 중국 책임론을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영국·호주·캐나다는 중국의 ‘홍콩국가보안법’ 제정을 비난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중 관계가 루비콘강을 건너는 중이다.
미국은 또 ‘탈(脫)중국 글로벌 공급망’ 구축을 목표로 하는 ‘경제 번영 네트워크(EPN)’ 동참을 제안했다. 경제 번영 네트워크는 주요 제품의 공급망을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과 가까운 국가들로 구성하는 새로운 연합체다. 호주·일본·뉴질랜드·한국 외에 인도·베트남에도 참여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주요 7개국(G7) 회의에 한국·러시아·인도·호주를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맞서 중국의 반발도 거세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 “한국이 G7 정상회의에 참가하면 제2의 사드 보복을 당할 수 있다”라고 보도했다. 물론 터무니없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참가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G7만으로는 글로벌 시대의 현안을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이 고려됐다. 한국은 세계 7위 무역대국이자 세계 12위 경제대국이다. 그 위상에 걸맞게 미·중 패권 다툼을 상수로 보고 국제사회의 미들파워로서 국익을 챙겨야 한다. 미·중의 압박에 가벼이 흔들리지 말고 건별로 일관된 원칙을 갖고 당당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의미다.
더구나 미·중 무역전쟁은 이제 상수로 자리 잡았다. 올해 1월 체결된 1단계 미·중 무역협정에 따라 당초 중국은 2년에 걸쳐 최소한 2,000억 달러어치의 미국 상품과 서비스를 추가로 구매할 예정이었다. 미국은 중국 상품에 대한 관세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사실상 휴지조각이 될 운명이다.
미·중 경제전쟁 2라운드의 핵심은 반도체 패권이다. 미 상무부는 당장 미국의 기술을 사용한 반도체를 화웨이가 쓰는 것을 막는 수출 규정 개정에 나섰다. 미국에서 생산된 반도체 수출에서 그치지 않고, 오는 9월부터 미국의 기술을 활용하는 해외 기업도 화웨이에 반도체를 공급하려면 미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조치다.
앞서 트럼프 정부는 지난해 화웨이 장비가 중국의 스파이 행위에 이용될 수 있다며 미국 기업과의 거래를 제한했다. 미국은 또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를 애리조나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은 “중국이 최첨단 기술을 지배하고 중요산업을 장악하려 하는 중대한 시점에 TSMC 유치가 이뤄졌다”라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국의 중국 견제가 강화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아예 반도체 자급체계 구축도 서두르고 있다. 중국에 집중된 글로벌 부품 공급망이 언제든 끊길 수 있게 되면서 국내에서 직접 반도체를 생산하겠다는 방침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 핵심기술의 아시아 의존을 걱정하고 있다”라며 “TSMC 공장의 애리조나 유치는 미국 내 반도체 자급체계를 확보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렇게 되면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공장도 고성능 반도체를 생산하는 방향으로 설비증설 요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폭스비즈니스는 전망했다.
특히 미국은 반도체를 중국 견제의 핵심 카드로 보고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AI)을 앞세운 첨단 무기의 두뇌가 결국 고성능 반도체이기 때문이다. 미 국방부도 미국의 디지털 산업이 중국, 한국, 대만의 아시아 3각 축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한다. NYT는 “미 국방부가 지난해부터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려면 반도체 자급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해왔다”라면서 그동안 인텔 등 미 반도체 회사들과의 접촉을 늘리며 대책을 촉구해왔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D램 업체 마이크론과 낸드플래시 업체 웨스턴디지털이 모두 글로벌 3위를 차지하고 있어 영향력을 언제든지 늘릴 수 있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2021년)까지 국민이 풍족한 삶을 누리는 샤오캉(小康) 사회 건설과 제조업 선진화를 달성한다는 ‘중국 제조 2025’의 관건이 모두 반도체 자급 능력에서 나온다. 나아가 신중국 건국 100년(2049년)까지 미국을 군사력에서도 능가하는 중국몽(中國夢) 달성의 열쇠 역시 바로 반도체 기술이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2025년까지 170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는 ‘반도체 굴기’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 최근 미국의 견제가 심해지자 중국은 자국 반도체 생산업체에 3조 원의 국영 펀드를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중국은 최근 화웨이가 5G 통신장비를 휩쓸면서 기술 굴기의 마지막 관문으로 반도체만 남겨두고 있었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SMIC는 화웨이의 스마트폰용 반도체칩 ‘기린710A’ 양산에 들어갔다. 이 칩은 화웨이의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업체)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에서 설계했다. 중국 기업이 100% 지식재산권을 가진 첫 반도체다. 해외는 물론 대만 기술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 개발했다. 기린710 시리즈는 그간 대만 TSMC의 12nm(나노미터) 공정으로 양산됐다. 기린 710A는 이보다 기술이 낮은 14nm 공정으로 제조됐을지라도 첫 중국산이라는 데 의미가 크다. SMIC는 최근 자사 전 직원에게 기린710A를 탑재한 화웨이 스마트폰 ‘플레이4T’를 지급했다.
중국은 5월 28일 폐막한 올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도 산업구조 고도화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최소 1,000조 원의 돈 폭탄을 터뜨려 반도체 기술 굴기를 완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 의지는 3년 전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 행사에서 시진핑 주석의 격려사 그대로다.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항거하는 정의로운 항미원조(抗美援朝·6·25전쟁을 의미) 전쟁에서 승리해 국위를 떨쳤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그야말로 고래싸움에 낀 처지다. 마침 미·중이 반도체 기술을 놓고 결전을 벌이게 되면서 반도체 강국인 한국으로선 그 영향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우리가 믿을 건 초격차 기술밖에 없다.
나아가 전기차·바이오·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 전 분야에 걸쳐 기술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여기서 앞서면 중국도 한국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당시 중국의 한국산 반도체 수입은 오히려 늘어났다는 사실이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특히 반도체에서의 초격차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다행히 정부의 대응은 적극적이다. 지난해 4월 문재인 대통령은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는 세계 1위를 유지하는 한편,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분야 세계 1위, 팹리스 분야 시장점유율 10%를 달성해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자”라고 주문했다.
정부도 한국 전체 수출의 20%를 웃도는 반도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반도체는 IT제품부터 각종 정밀 무기에 필수적이다. 정부의 고무에 힘입어 지금까지는 순조롭다. 지난해 SK하이닉스의 새로운 공장을 수도권인 경기도 용인에 건설하도록 허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로써 SK하이닉스는 이천·청주·용인을 3각 축으로 하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확보하면서 120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비전’의 후속조치로 18조 원을 들여 경기도 평택에 초미세 극자외선(EUV) 장비를 도입한 파운드리 공장과 최첨단 낸드플래시 생산라인을 구축한다. 국내 중소 팹리스의 개발 활동에 필수적인 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 프로그램도 공정당 연 3~4회로 확대해 업체들의 최첨단 반도체 제작을 지원하고 있다.
과거 메모리반도체 치킨게임서 한국에 무릎을 꿇었던 일본도 인텔·TSMC의 생산 거점 유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나섰다. 대만은 미국이 확실한 반대급부를 제공한다면 화웨이와의 거래를 완전히 단절하는 선택에 나설 가능성도 크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여기서 생존하려면 무엇보다 산업화 시대의 낡은 규제는 반드시 완화해야 한다. 한국판 뉴딜의 핵심 사업으로 디지털·비대면 산업이 포함됐지만, 이 분야는 기존 규제를 그대로 두고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미·중 패권 다툼이 계속되고 탈중국과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가 불가피하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