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전쟁사

한·중·일 3국의
고구마 교역

심종석 대구대 무역학과 교수, 경영학 박사·법학 박사

고구마가 동아시아에 유입되던 16~18세기는 한·중·일 3국이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전환하던 시기였다. 세계사적으로는 아시아와 유럽이 독자적으로 발전하던 흐름에서 벗어나 대륙 간, 지역 간 상호 전방위적인 문물의 교류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고구마는 당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중심에 있던 교역품목 중 하나였다.

본래 남미가 원산지인 고구마는 기원전(B.C.) 5000년경부터 재배되기 시작해 15세기 유럽이 개척한 대양의 해로를 따라 동아시아 최초로 1584년 중국의 섬 남오도를 거쳐 1597년 일본 오키나와에 전래됐다. 이후 1715년 대마도에 전해지고 조선에는 176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입된다. 당시 고구마를 조선에 들여온 사람은 예조참의 조엄(1719~1777)이다. 그는 일본에 통신사로 가던 도중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고 이를 수입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당시 일을 “대마도에는 고귀위마(古貴爲麻)가 있다. 일행 가운데 이것을 구한 사람이 있다. 요행히 이것이 우리에게도 잘 자라 퍼진다면 문익점의 목화처럼 백성을 매우 이롭게 할 것이다”라고 고구마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한·중·일 3국의 해양정책과 고구마 전파

고구마가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 전파된 경로를 더듬어보면, 점점이 이어진 도서지역을 징검다리 삼아 천천히 이동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고구마의 전래경로는 한·중·일 3국의 해양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육·해상 모두 고구마의 유입과 전파에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명·청 시대에는 왜구 방어를 위해 해상무역을 강력히 봉쇄하는 이른바 해금정책을 펼쳤다. 조선의 경우 조공책봉체제의 틀 속에서 명·청보다 더 강력한 해금정책을 시행해 세상과 통할 수 있는 통로는 오로지 동북지역의 육로만을 열어놓고 있었다. 조공단을 통한 간헐적인 교류만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1426년부터는 ‘사사로이 바다로 나가 이익을 취한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하는 등 해양 진출을 강력하게 규제했다. 모두가 바다를 통해 교류하던 시기에 조선은 홀로 바다를 닫고 좁고 느린 육로를 통해 오직 중국과만 교류했으니 고구마와 같은 선진문물은 좀처럼 조선으로 유입될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해양활동이 활발하던 고려시대에 섬이 해양활동의 거점으로 활용됐던 것과는 대비된다. 결국 고려 시기라면 중국 남부에서 한반도까지 5일이면 도달할 수 있었던 고구마가 179년이 걸려 조선에 도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일본은 일찍이 중국과 조선의 해양정책과는 달리 전격적인 개방정책을 주도하여 해상으로부터의 새로운 문물을 중국과 조선에 비해 한층 이른 시기에 수용하고 또한 이를 전파할 수 있었다.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인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결정적 발판을 마련한 인물로서 일찍이 무역과 해운에 눈을 떠 이후로 일본이 해상 및 해운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게 한 주춧돌을 놓았다. 일본이 서구열강과 해상교류가 가능하였던 것은 조선이나 중국과 달리 해양국가였다는 지리적 특징도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각국의 해양정책은 결국 고구마와 같은 중요 작물, 즉 선진문물의 수용에 대한 시각 차이를 낳았고 결국은 각국의 운명을 갈라놓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마의 명칭은 전래 초기에는 감자와 구분 없이 혼용됐다. 이후 대마도에서 사용되던 명칭인 고귀위마의 영향으로 ‘고구마’라는 별칭으로 널리 통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구마는 본래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 흉년에도 수확할 수 있는 구황작물이다. 감자보다 훨씬 단맛이 강할 뿐만 아니라 김치와도 궁합이 잘 맞아 남녀노소 누구나가 즐겨 찾는 서민 먹거리로 그 지위를 보전하고 있다.

자료 참조: 고구마의 이동을 통해 본 16-18세기 동아시아 각국의 해양인식(아태연구 2014, 김인회)

고구마 전파 경로

B.C. 8000년~
페루의 고구마 잔존물로서 추정하는 생성 시기.
B.C. 5000년~
중앙아메리카에서 사람에 의해 길러짐.
1584년
동아시아 중국 남오도(南澳島)에 전래됨.
1597년
일본 오키나와에 전래됨.
1715년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전해짐.
1763년
예조참의 조엄 (趙曮·1719~1777)이 조선에 들여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