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례로 보는 통상

어느 날 수입산 소고기 정육점이
사라졌다?

임송수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

우리나라는 1989년부터 10여 년간 정육점에서 국내산과 수입산 소고기를 따로 판매하는 ‘소고기 구분판매제’를 실시한 적이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수입 소고기 정육점이 꽤 많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미국 등 소고기 수출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를 했기 때문이다. 이후 소고기 구분판매제도가 ‘차별적 제도’라는 WTO의 판정에 따라 전면 폐지됐다.

1999년 2월과 4월에 미국과 호주는 한국이 국내산 소고기와 달리 수입 소고기를 차별한다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각각 제소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1997년 말부터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소고기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수입 소고기의 쿼터(Quota)를 채우지 못하게 됐는데, 수출국들이 이에 불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더 핵심적인 쟁점은 1989년부터 한국이 도입한 수입 소고기 전문판매점 제도였다. 저가의 수입육을 국내산 소고기로 둔갑시켜 판매하는 것을 막아 유통질서를 확립하고 가격안정을 이루기 위한 조치였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국내산 소고기의 절반 이상을 취급하는 정육점을 대상으로 추정한 결과에 따르면, 1996년에 정육점이 취급한 국내산 소비량의 37%가량이 실제로는 수입 소고기였다. 달리 말하면, 수입 소고기 소비량의 43%가 국내산으로 둔갑해 판매된 것이다. 이렇게 만연한 둔갑판매의 폐해를 차단하기 위해 수입산은 수입 소고기 전문매장에서만 판매하고 국내산은 국내산 소고기 판매점에서만 판매할 수 있게 한 것인데 수출국에서 이를 문제시한 것이다.

수출국과 우리 정부의 팽팽한 주장

미국과 호주는 한국의 구분판매제도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제3조 4항(내국민대우)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내국민대우(National Treatment)는 수입한 상품의 유통과 판매에 영향을 주는 법률, 규정, 요건에 관해 국내산 동종 상품에 부여하는 대우보다 불리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원칙이다. 수출국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들어 수입산 소고기가 한국시장에서 국내산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WTO, 구분판매는 GATT 규정 위반

양측의 주장에 대해 WTO 패널(Panel)은 한국의 구분판매제도가 국내산에 비해 수입산 소고기를 차별적으로 대우한 것이므로 GATT 제3조 4항을 위반했다고 판정했다. 특히 구분판매제도 자체가 동종 상품인 국내산과 수입산의 차별적 대우를 반드시 발생시킨다고 보았다. 또한 한국이 국내산과 수입산 판매점에 동등한 규제를 적용했더라도 구분판매가 수입산 소고기의 경쟁 조건에 영향을 미쳤는지가 중요한데 이에 관한 사실적 분석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WTO 상소기구(Appellate Body)도 패널의 판정을 지지했다. 다만 패널이 구분판매제도 자체가 차별이라고 본 것과 달리 상소기구는 구분판매제도로 말미암아 수입산에 불리한 경쟁조건이 부과됐는지가 내국민대우 원칙의 위반 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라고 상기시켰다. 이 기준 아래 상소기구는 구분판매제도가 수입산 소고기의 경쟁 기회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았고 이로써 한국의 조치가 GATT 규정을 위반한 경우라고 판정했다.
한국이 주장한 GATT 제20조 (d)항에 관해서는 구분판매제도에 문제가 있으나 GATT 규정에 부합한 조치로 패널이 인정했다. 다만 한국이 다른 비슷한 상품에는 이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고, 구분판매제도 이외의 방식으로 기망행위를 방지할 수 없다는 근거 제시가 미흡하다는 점에서 이 제도가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판정하진 않았다.

수출국의 주장
① 수입 소고기 판매점은 5,000개소인 반면 국내산 판매점은 4만5,000개소다.
② 수입산을 국내산 소고기와 같은 판매점에서 나란히 판매하지 못하게 강제로 분리했다.
③ 수입 소고기를 분리해 진열할 경우 수입산의 부담이 커진다.
우리 정부의 주장
① 정부가 판매점 수를 제한하지 않았다.
② 국내산과 수입산 소고기를 구분하기 어렵고 두 상품의 가격 차이가 큰 상태에서 둔갑판매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다.
③ 국내산 소고기도 수입산 소고기 판매점에서 판매할 수 없도록 동등한 규제(규제의 대칭성)를 적용했다.
④ GATT 제20조 (d)항이 “기망적 관행의 방지”에 필요한 조치를 예외적인 사항으로 허용하는 만큼 구분판매제도는 한국의 불공정경쟁법에 따른 정당한 규제로 인정해야 한다.

WTO 분쟁해결 타임라인

  1. 1999.2 : 미국 제소(호주·뉴질랜드· 캐나다 제3자 참여)
  2. 1999.4: 호주, 독자 제소
  3. 1999.5: 한·미 간 양자타결 실패로 미국이 요청한 WTO 패널 설치
  4. 1999.7: 호주가 요청한 WTO 패널 설치, 미국 WTO 패널과 통합
  5. 1999.12: 1차 구두심리 개최
  6. 2000.2: 2차 구두심리 개최
  7. 2000.5.10: 패널 중간보고서 배포
  8. 2000.7.31: 최종보고서 배포
  9. 2000.9.11: WTO 상소
  10. 2000.12.11: 상소기구 보고서 배포
  11. 2001.9: 구분판매제 폐지 이행
  12. 2002: 거래내역비치제도 시행
2001년 9월부터 구분판매제도 폐지 이행

한국과 제소국들은 상소기구 보고서를 채택한 2001년 1월 10일부터 8개월 안에 그 판정 결과를 이행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2001년 9월부터 소고기 구분판매제도를 폐지하고 국내산과 수입산 소고기를 동시에 판매하는 판매점을 허용했다. 또한 둔갑판매를 막기 위해 육류 판매업자가 고기의 종류와 물량, 원산지, 매입처 등 그 거래내역을 기록하고 이를 1년간 보관하도록 하는 거래내역비치제도를 2002년부터 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