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자유무역의 당위성이 확산되고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늘면서 세계무역시장의 문턱은 낮아지고 있다. 관세 부과와 인위적인 수입수량 제한으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국가도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비관세 장벽이 높아지면서 보호무역이 강화되는 추세다. 무역기술장벽(TBT; Technical Barriers to Trade)은 가장 흔한 비관세 장벽으로 꼽힌다.
TBT의 핵심은 역시 기술이다. 제품 생산에 사용된 기술이 수입국 정부가 정한 기술규정 또는 표준을 충분히 지켰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특정 분야의 기술을 자국 기술규정 또는 표준으로 정하면 외국 기업들은 그만큼 수출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기술이 개별 국가의 TBT를 넘을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방법으로 ‘적합성 평가절차’가 있다. 특정 제품이 이미 설정된 기술 규정이나 표준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절차다.
문제는 많은 나라가 적합성 평가절차의 기준이나 적용 법률을 해외에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일 제품에 여러 개의 적합성 평가절차를 중복해 만들기도 하고 처리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는 등 여러 불편을 준다. 기술 수준이 높은 국가라도 적합성 평가절차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TBT에 가로막혀 수출이 좌절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TBT 분야의 다양화도 중요한 통상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단순히 제품의 품질이나 안전성이 아니라 보건과 환경보호까지 TBT 적용 분야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적용 대상 단계도 제품의 품질을 넘어 생산과정과 유통, 소비된 이후 폐기와 재활용까지 늘어나고 있다. 단계마다 기술규제와 기술표준, 시험인증 등이 도입되며 하나만 제대로 지키지 못해도 TBT를 넘지 못해 수출이 막히는 사례가 나타난다.
생산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탄소를 배출했거나, 생산에 투입된 근로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했다면 TBT와 관련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같이 광범위한 적용 대상과 예상이 쉽지 않은 적용범위는 TBT가 가장 강력한 자국 산업 보호수단이 되는 이유다.
TBT는 그 규정의 모호성만큼 국가 간 통상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 이를 줄이기 위해 WTO가 회원국들에게 TBT의 기술 요건이나 표준 제정에 일정한 원칙과 의무를 부과한 것이 TBT 협정이다. 여기서는 공공 정책상의 정당한 목적 달성 등으로 TBT 도입 요건을 제한하고 무역제한 최소화와 투명성 확보 등도 요구하고 있다. WTO는 산하에 TBT위원회를 두고 회원국들이 새로 도입하거나 개정하는 TBT 관련 제도를 취합하고 있다.
취합된 내용을 회원국들이 회람해 의견을 진술하거나 적응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WTO TBT위원회가 개별 국가의 TBT를 사전 논의하는 역할을 하면서 위원회에서는 새로운 TBT 도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국가와 이를 비판하는 국가 사이의 논쟁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사안에 따라 설득과 회유부터 공격과 비판까지 이뤄진다.
TBT 협정을 통한 문제 해결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TBT의 태생적인 모호함과 광범위한 적용 대상 때문이다. 각국이 도입하는 TBT가 정당한 공공정책의 연장선인지 보호무역 조치의 일환인지 제3자가 판단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TBT는 선진국이 개도국의 수출을 차단하는 데 주로 쓰였다.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가격을 무기로 자국 시장을 잠식하는 개도국 제품을 선진국이 TBT 기준을 높여 차단한 것이다. 하지만 2010년 이후에는 개도국의 TBT 활용 흐름이 뚜렷하다. 2019년만에 신규로 도입된 개도국의 TBT 건수는 1,750건으로 전제 건수의 84%를 차지한다.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과 인도 등 많은 인구를 보유한 개도국들은 TBT를 통해 선진국 기업들의 진입을 막고 있다. TBT가 꼭 기술적 난이도의 문제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비자의 취향이나 문화적 차이 등을 반영해 개도국도 임의로 TBT를 설정할 수 있다.
개도국이 활용하는 TBT의 주요 사례로 인도의 국가표준기구(BIS; Bureau of Indian Standards) 인증 제도를 들 수 있다. 2020년 현재 인도는 시멘트부터 종이까지 269개 품목에 BIS 인증을 의무화하고 있다. 인증받지 않은 제품은 인도 내에서 판매할 수 없다.
공장 생산 시스템의 평가를 통해 부여되는 BIS 인증은 인증 과정이 까다로운 데다 갱신 비용을 따로 내야 한다. BIS 인증을 받으려면 기술이나 품질적 필요와 상관없이 전용 생산라인을 지어야 한다. 생산라인을 짓지 않으려면 제품 하나당 별도의 수수료를 내고 BIS 인증 마크를 구입해 찍어야 한다. 이 때문에 2014년, BIS 인증이 타이어에 적용된 직후 국내 업체들의 인도 타이어 수출이 2012년 대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무분별한 TBT 운영에 여러 국가가 불만을 나타내지만, 이를 통제하기도 어렵다. TBT가 수출 걸림돌로 부상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