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디지털 표준 수립은 개방적인 민간 주도형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중국의 국가 주도형 표준화 정책과 매우 대비되는 형태로, 많은 민간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매우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 정부의 개입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의 국내 표준은 민간기업들이 제안하고 시장원리에 따라 경쟁적으로 채택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국제기구에서의 표준화 논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미국 기업들이 속도가 느린 국제표준화 노력보다 신흥기술에 대한 시장수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솔루션 개발 등 컨소시엄 방식을 선호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표준화 관련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위상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게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중국이 사무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ITU에서는 기존 정보통신 관련 논의의 범위 대상에 신흥 통신기술 분야를 포함해 인터넷 거버넌스(Internet Governance) 관련 문제를 포함시킬지 여부에 대해 중국은 찬성하고 있는 반면, 미국은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디지털 기술 표준을 비롯한 디지털 산업 정책과 관련해 기존 민간 주도형 방식에서 벗어나 국가안보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정책적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작년 3월 미 백악관은 5G 기술에 대한 안보 국가전략(National Strategy to Secure 5G)을 발표하며 5G 네트워크 기술 선도의 중요성과 함께 해킹 취약성, ‘고위험 5G 기업’이 초래할 국가안보 위협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미국의 디지털 통상 정책도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은 무역협정을 통해 데이터의 국경 간 이전 자유화 및 데이터 설비 현지화 금지 등을 의무화하는 수준 높은 디지털 통상 자유화를 표방해왔다. 또한 개인정보 보호의 수준이나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에 대해서는 규제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도입하고 있다. 디지털 무역 협정은 디지털 통상 분야의 규범 수립을 주도함으로써 향후 적용될 디지털 표준 수립에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개인정보 보호 관련 법제도를 정비하는 방향으로 입법화를 추진 중이다. 글로벌 온라인 플랫폼 기업에 대한 규제와 관련해서도 국제적 합의를 도출하도록 협조적 태도로 선회한 모양새다. 또한 최근 미국은 5G, 인공지능(AI) 등 신흥기술 산업 분야에서 가장 급격한 성장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과의 디지털 무역 협정 체결에 관심을 표명한 바 있다. 이는 최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활발하게 체결되고 있는 다양한 디지털 통상 규범화 노력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한 목적과 함께 아시아 지역에서의 디지털 통상 규범 수립 노력을 직접 주도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향후 디지털 표준화 노력의 주요 무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될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중국은 주요 산업정책을 통해 디지털 강국 도약을 위한 목표를 지속적으로 발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15년부터 추진된 ‘인터넷플러스 정책’을 통해 전자상거래, 인터넷 금융 등 11개 디지털 신산업을 우선 지원하고 있으며, 올해 3월 발표한 ‘14차 5개년 규획’에서는 디지털 중국 건설을 목표로 7대 중점산업과 8대 응용분야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중국 국가표준화관리위원회는 2021년 4월 ‘2021년 전국 표준화 작업 요점(이하 표준화 요점)’을 발표했다. 이는 중국 미래산업 전략의 청사진이 될 ‘중국표준 2035’에 담길 내용을 미리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상기 표준화 요점을 통해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블록체인 분야 등의 표준 제정을 명시했으며, 신형 정보인프라의 표준 개발 및 데이터 안전, 산업 인터넷, 스마트자동차 데이터 수집 등의 국가 표준 제정을 언급했다. 또한 디지털 트윈, 공급망 관리 등의 표준을 개발해 국가스마트 제조 표준체계를 보완하는 한편 차세대 정보기술체계 구축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중국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에서 이미 다수의 기술제안서 제출과 국제표준화 활동을 추진해왔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 경쟁국들은 중국의 이러한 국제표준 개발 활동이 디지털 영역으로 확대될 것을 경계하며, 중국 중심의 표준 제정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중국은 자국 내 디지털 산업을 집중 육성함과 동시에 규제 정책을 강화하면서 중국 중심의 글로벌 디지털 규범 정착을 위한 주요국과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올해 9월 1일부터는 중국 내 정부와 기업이 다루는 데이터 관리를 엄격히 규제하는 법안인 ‘데이터 보안법(數據安全法)’이 시행되었다. 이는 구글, 페이스북 등 외국 기업이 중국 현지 데이터를 활용하려는 시도를 차단함으로써 독자적인 데이터 시장 및 규범 체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중국의 의지를 나타낸다. 또한 데이터 현지화, 소스코드 및 지식재산권 접근 권한 요구 등 중국 내 데이터 규범을 강화하면서 자국 중심의 글로벌 디지털 무역시장 재편을 꾀하고 있다.
2019년 ‘디지털 서비스 무역제한지수(Digital STRI)’1) 순위에서 중국은 주요 20개 국가(G20) 중 최하위를 기록해 가장 폐쇄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이러한 디지털 산업 규제가 향후 주요국 및 국제사회와의 디지털 표준 제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변수로 지목되고 있다.
중국은 협력 국가와의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중국 표준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해외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국제표준화 활동에 매진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디지털 기술과 비즈니스 경쟁력이 이미 주요 선진국을 위협하는 수준에 올라온 만큼 향후 독자적인 정책과 블록화를 강행할지 국제사회 편입을 강화할지 추진 정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EU)은 2015년 디지털 단일시장 전략 채택에 이어 2020년 미래 디지털 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전략 ‘디지털 시대의 유럽(A Europe Fit for the Digital Age)’을 발표했다. 디지털 주권을 강화하고 디지털 표준을 제정해 지속 가능한 디지털 환경 속에서 디지털 경제에 적합한 유럽을 만들겠다는 적극적인 디지털 전략이다.
유럽연합(EU)은 디지털 분야에서 미국 및 중국과 대등하게 경쟁하고 디지털 경제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데이터, 인공지능(AI), 정보통신기술(ICT) 부문에서 기술적으로 우월한 표준을 개발하고 모범 관행을 확산하며 국제표준 관련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먼저, EU의 데이터 전략은 단일한 유럽 데이터 공간 창출을 목표로 한다. 데이터 통합 및 상호운용성 확보를 위한 디지털 표준의 핵심은 호환 가능한 데이터 양식과 프로토콜을 개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AI 전략 분야에서도 디지털 표준정책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 EU는 신뢰할 수 있는 AI의 보급을 위해 개인정보를 철저히 보호하고 공정성과 투명성을 강화하며, 고위험 AI 시스템을 규제하는 한편, AI 표준 개발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AI 표준화의 일환으로 고위험 AI 사전심사를 의무화했으며 저위험 AI의 자발적 라벨링 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다. ICT 표준 개발도 추진 중인데 핵심 표준, 사회문제 해결형 표준, 단일시장 통합형 혁신 표준, 지속가능 성장을 위한 표준화가 ICT 표준의 4대 주요 분야로 논의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인권을 중시하고 공정한 시장경쟁을 추구하는 EU의 디지털 전략은 디지털 통상 정책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다만 명분과 달리 EU의 디지털 통상 정책이 자국의 디지털 산업을 보호하고 외국 기업을 사실상 차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자 이를 둘러싼 통상 갈등도 점차 빈번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통상 이슈 중 하나가 EU의 일반 개인정보보호법(GDPR)이다. EU는 GDPR을 통해 개인정보의 역외 이전을 제한하고 이를 위반하는 기업에는 상당한 과징금을 부과한다. 외국 기업이 EU 시민의 개인정보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의 무역장벽으로 작용한다. 디지털서비스세(DST)도 논란의 중심에 있다. 유럽이사회와 일부 EU 회원국은 매출이 발생한 국가에 기업이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아직 디지털 시대의 조세체계는 국제적으로 합의된 바가 없으며 DST의 적용대상도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대부분 비 EU권 기업이다.
미국과 중국의 거대 인터넷 기업에 디지털 분야의 주도권을 내준 EU는 자신들만의 목적과 가치를 내세워 EU 중심의 디지털 생태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사이버 공간의 규제 체계와 통상 규범이 미국, 중국, EU 등 거대 경제권을 중심으로 파편화되는 현상은 내수 시장의 규모가 절대적으로 작은 우리의 디지털 산업에 불리하다. 우리 디지털 기업과 정부로서는 EU의 디지털 표준화 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EU와 협력해 디지털 통상을 촉진하는 국제통상 규범의 형성에 기여해야 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디지털 표준은 자국 내 전송과 거래가 우선이고, 국제 관계에서는 국가 간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디지털 표준은 글로벌 온라인 플랫폼이 제시하고 있는 플랫폼 내에서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최근 논의되는 디지털 표준은 국경이라는 기준, 국가별 표준을 위주로 하는 기존 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동영상 플랫폼인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나 인터넷상거래, 가상세계를 현실화한 메타버스 등을 들 수 있다. 플랫폼은 기본적으로 그 편리성 때문에 비교우위가 있는 곳으로 이용자가 집중되기 마련이고, 전 세계를 범위로 한 관련시장에서 독점이 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이 과정에서 시장에 영향력 있는 플랫폼이 이용자에게 불편함을 끼치는 사례가 나오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8월 국회를 통과한 전기통신사업법2)을 들 수 있다. 이는 세계 최초로 앱 마켓 사업자가 콘텐츠 사업자에게 특정 결제 방식을 강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으로 최근 디지털 표준 전쟁에서 전 세계에 온라인 상거래 질서를 위한 우리의 표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글로벌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현상에 맞서서 우리 시장을 보호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국제표준은 전 세계가 동일한 기준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해당 분야를 발전시키는 데 목적이 있지만 최근의 논의를 보면 글로벌 플랫폼들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데 너무 치우쳐 자칫 폐쇄적 생태계로 변질될까 우려된다. 모두가 아는 표준 전쟁의 일례로 폐쇄적인 자국 중심의 베타 방식은 가정용 비디오 방식(VHS; Video Home System)에 완패한 바 있다.
플랫폼 위에서 거래되는 우리의 콘텐츠, 게임 등은 글로벌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들이 경쟁력을 더 키우기 위해서는 공유와 접근의 자유, 그리고 안정성 등을 기준으로 거래질서를 위한 다양한 표준이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표준이 주도하게 될 경우 플랫폼 경제의 특성상 독점의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고 플랫폼 경제에서 경쟁력 있는 디지털 콘텐츠가 거래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하는 것도 대안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쟁이 무한히 가능하도록 하고, 혁신을 끊임없이 장려하면서 다양한 플레이어들과 협력을 통한 디지털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글로벌 온라인 플랫폼이 주도하고 있는 디지털 통상 질서에서도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비스 간 호환성과 이용자의 선택권을 보장하며, 이를 통해서 데이터 접근권을 향상시켜 결국에는 디지털 경제 내에서 혁신을 장려하고 이용자 편익을 극대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