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사진WTO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연기됐던 제12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MC12)가 스위스 제네바 소재 WTO 본부에서 11월 30일 열린다. 벌써부터 201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11차 각료회의(MC11)의 전철을 밟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MC11에서는 전자상거래, 수산보조금 등 의제 합의에 실패했고 회원국 간 입장 차이로 관례적으로 발표되는 각료선언도 없이 끝났다. 이 시기에는 WTO 무용론을 주장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고, 미국의 의중대로 각료회의가 파행을 겪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올해 집권한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다자통상체제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몇 번 했고, 전임 행정부와의 차별화를 강조했기에 국제사회는 4년 만에 열리는 이번 WTO 각료회의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였다. 더구나 지난 5월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WTO 특허면제 논의에 미국이 참여할 것임을 밝히면서 드디어 미국이 WTO에 관심을 보인 것으로 분석하는 보도도 있었다. 백신 특허면제는 지난해 말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WTO 지식재산권 이사회에 제안한 것으로, 올 들어 몇 차례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회의도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올해 취임한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Okonjo-Iweala) WTO 사무총장이 성과를 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주요 의제에 대한 논의가 진전을 보이지 않아 벌써부터 실패를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각료회의가 실패할 경우 사무총장직을 사임할 것이란 점도 언급한 바 있는데, 회원국들의 합의 도출을 독려하기 위한 전략일 수 있으나 임기 1년도 안 돼 사임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복수 간 협정에 대한 합의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전자상거래와 수산보조금은 10년 이상 논의해온 사안으로 큰 틀에서는 합의됐으나 몇 가지 세부사항에 대해 이견이 좁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WTO 전자상거래 협상에서 전자서명, 전자인증, 종이 없는 무역, 스팸메시지 등에 대해서는 사실상 합의를 도출한 반면, 전자적 전송품에 대한 항구적 무관세화, 국경 간 데이터 이동, 데이터센터 위치 현지화, 소스코드 공개 등에서는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입장 차이가 여전하다. 만약 무관세화만 합의되면 기존 합의된 사항을 묶어 성과로 내세울 수 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유해수산보조금 금지는 수산물 과잉생산과 남획, 불법·비규제·보고되지 않은 어업(IUU)을 양산하는 보조금 지급 중단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도 연관되며 호주, 뉴질랜드 등 수산보조금 금지 주도국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개도국은 어족 자원 보호 차원에서 수산보조금 금지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예외조항(Carve-outs) 등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장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가에 따라 유해한 수산보조금의 범위를 달리 설정하고 있고, 보조금 금지를 주장하는 개도국은 자국에 대해서는 예외로 허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년 전에 시작된 수산보조금 금지 협상은 가장 진도가 많이 나간 분야로 MC12에서 합의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WTO로서는 최소한 이 분야라도 협상을 타결시켜 WTO 회생의 발판을 삼고자 할 것이다.
1986년 시작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당시 합의를 도출할 수 없었던 농업분야 규범, 서비스, 지식재산권 보호, 개발협력, 지속가능성장 등에 대해 국제사회는 WTO 출범 5년 시점에 새로운 다자간 통상협상을 개시하기로 합의하고 WTO를 출범시켰다. 이 후속 협상이 도하개발어젠다(DDA)다. WTO는 ‘3년 내 DDA 협상 타결’을 목표로 설정했지만 이후 수차례 협상 시한을 연기했다. 협상은 관세감축, 국내보조 등 농업 관련 이슈에 대해 선진국과 개도국 간, 미국과 유럽연합(EU) 간 입장 차이로 장기화되다가 2008년 소규모 각료회의에서 타결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개도국의 특별긴급수입제한조치가 쟁점화되어 결국 불발됐다.
DDA 협상 표류로 위기감을 느낀 국제사회는 WTO의 ‘일괄타결 원칙’을 포기하고, 합의 가능한 분야를 중심으로 일부 분야라도 성과를 내는 방식으로 협상원칙을 수정해 2013년 제9차 각료회의(MC9)에서 발리 패키지 합의를 시도했으나 다시 실패했다. 농산물 수출보조금에 대해 겨우 합의한 것이 2년 뒤 열린 제10차 각료회의(MC10)에서였다. 선진국과 개도국의 모든 농산물 수출보조금을 2023년까지 차등 철폐하기로 했지만, WTO가 더 이상 DDA 협상을 지속할 동력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자통상 규범보다는 ‘힘에 기반한(Power-based) 일방주의’ 통상정책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 집권시기인 201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각료회의(MC11)의 결과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다자통상체제는 미국이 주도해 구축한 것으로, 2001년 미국은 신자유주의 기조하에 중국의 WTO 가입을 허용했다. 2020년 7월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 국무장관이 미·중 수교를 성사시킨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기념도서관 연설에서 ‘닉슨 데탕트’를 부정한 것에 나타났듯이 미국은 중국과 갈라서기(디커플링)를 추구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무역규제 및 기술보안과 더불어 WTO를 고사시켜 무역을 통한 중국의 성장을 차단하는 작전을 추진하고 있다.
기대와 달리 바이든 행정부도 이번 MC12에 소극적인 입장이다. 지난 10월 초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 및 양자 통상장관 회의에서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중국을 겨냥해 비시장경제 도전과제 해결방안을 집중적으로 언급했을 뿐 현재 WTO가 당면한 문제와 11월 말 열릴 MC12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말을 아꼈다. OECD 각료이사회 하루 전 타이 대표는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설을 통해 대(對)중국 통상정책 기조를 발표했는데, 미·중 온라인 비대면 정상회의 일정도 있지만 다분히 OECD 각료회의에서 우방국과 대(對)중국 정책 공조를 염두에 둔 의도적인 연설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번 MC12에서 WTO를 정상화시키고 성과를 내려는 의지보다는 대(對)중국 정책을 조율하는 계기로 활용할 듯하다. 중국의 비시장경제적 정책을 WTO가 규율할 수 없다고 판단한 트럼프 전 행정부는 상소기구(Appellate Body) 상소위원 선임을 반대함으로써 분쟁해결기구(DSB)를 무력화시켰다. 지난 9월 30일 상소위원 선임에도 바이든 행정부는 반대표를 던졌다.
주제 | 수산보조금 | 농업 | 산업보조금 | 분쟁해결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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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쟁점 |
▣금지 대상 보조금 기준 (규율 방식) ▣개도국 특별대우 |
▣국내보조금 감축과 통보 ▣식량안보 목적의 공공비축 ▣개도국 특별세이프가드 등 |
▣국영기업과 산업보조금 관련 WTO 규범의 재개정 ▣중국의 산업보조금과 국영기업 이슈 |
▣상소기구의 문제 ▣임시상소기구의 확대 |
전망 |
▣개도국에 대한 예외조항 수준에 따라 합의 여부가 달라질 전망 ▣세부 이슈별로 부분적 합의를 이룬 타협안 도출 가능성 |
▣회원국의 기존 입장 불변으로 합의 도출은 어려울 전망 ▣수출제한 분야의 부분적 성과 |
▣미·EU 간 보조금 이슈의 교착상태 ▣산업보조금 재개정 이슈의 빠른 진전은 기대하기 어려움 |
▣상소기구 기능 정지와 MPIA가 작동하는 현재 상태의 유지 |
이번 MC12는 선진국과 개도국 간 각축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인도와 남아공이 제안한 코로나19 백신 특허면제 제안에 대해 개도국은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코로나19 게임 체인저로 평가받고 있는 백신의 보급과 접종이 선진국에 편중돼 있어 특허면제가 되면 이러한 불균등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도 “백신은 경제정책이면서 무역정책”이라며 백신에 대한 특허면제 논의를 가속화해 올 MC12에서 확정지을 계획을 세웠다. 코로나19로 피해가 워낙 컸고, 백신 공급이 부족한 아프리카 지역 출신이므로 관심이 컸을 수 있다. 최근 WTO 일반이사회 데이비드 워커 의장은 백신 수급을 무역 관점에서 강조했다. 즉 무역은 백신 생산 및 유통에 필수적이며, WTO는 백신 수출제한 축소, 무역촉진, 공급망 병목현상 해결, 지식재산권에 대한 실용적인 해결책 등을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MC12를 앞두고 WTO 고위관계자들이 발표하는 향후 협상 관련 언급에서 특허면제 부분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이번 MC12에서 논의는 될 수 있겠지만 합의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백신에 대한 공평한 접근이 비즈니스와 경제성장에 매우 중요하고, 코로나19가 전 세계가 백신 접종을 받을 때까지 글로벌 공급망과 성장을 방해할 위험 요소이지만, 백신 특허면제 이슈가 WTO에서 만장일치로 지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 바이든 행정부가 백신 특허면제 논의에 참가할 의향을 밝힌 것은 독일 등 선진국의 반대로 어차피 합의되지 않을 사안이므로 개도국 편에 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외교적 성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무런 부담 없이 생색만 낸 셈이다.
WTO는 1986년 시작된 UR 협상 타결로 1995년 출범했다. UR에서 약속한 무역자유화 이행과 통상규범의 확립으로 세계무역은 빠르게 성장하면서 세계경제 발전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세계무역은 12%나 줄어들었고 이후 세계경제 성장률보다 무역 증가율이 밑도는 현상이 빈발해지고 있다. 이는 WTO의 위상 약화와도 관련될 수 있다. WTO 출범을 전후해 세계화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고 글로벌가치사슬(GVC)이 세계무역 확장의 새로운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GVC 확장은 정체됐고, 세계적인 컨설팅 기관인 매킨지연구소가 분석한 바와 같이, 세계 주요 산업의 GVC 무역이 눈에 띄게 위축됐다.
세계무역의 위축과 GVC 정체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는 심각한 리스크 요인이 아닐 수 없다. WTO가 당장 폐지되지는 않겠지만 역할이 점점 줄어들 것이고, 보호무역주의는 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무역협정(FTA)은 긴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 양자 간 FTA를 업그레이드하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 메가 FTA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