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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질서의 판도를 바꾼 소금 교역사(史)

네덜란드인은 17세기를 ‘황금시대(Gouden Eeuw)’라고 부른다. 당시 세계경제사의 ‘승자’가 네덜란드였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 패권국가 부상의 배경에 ‘소금’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은 널리 회자되는 스토리는 아니다. 당시 소금은 어떻게 국제질서의 흐름을 흔들었을까.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중기과학부 부장

아르트 안토니즈(Aert Anthonisz), 카디스 전투(The battle of Cadix), 1608,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경제사학자 조너선 이스라엘 런던대 교수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7세기 초중반에 세계무역을 주도하면서 글로벌 교역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실상 일극 체제의 허브로서 세계 유일의 물자창고 역할을 했다. 유럽대륙 물자의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중앙저장소 역할을 맡아왔다는 것이다. 네덜란드가 국제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 발트해 교역에서부터다. 원래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 발트해 주변 지역에선 필요한 소금을 북독일이나 폴란드의 암염광산에서 생산된 암염을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사용했다. 그런데 15세기 후반부터 발트해 지역의 소금 교역은 네덜란드인의 주 무대가 된다.

소금 교역의 주역으로 등장한 네덜란드

네덜란드가 일찍부터 소금 교역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양질의 바닷소금을 확보한 덕분이다. 채굴하기 어렵고 운반에도 힘이 드는 독일산 암염에 비해 네덜란드인들은 양질의 바닷소금을 대량으로 운반하면서 한자동맹과의 경쟁에서 이겼다. 이 같은 성공가도엔 네덜란드의 조선업 경쟁력도 한몫했다. 16세기 후반이 되면 네덜란드 선박은 화물 적재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된다. 당시 경쟁국인 영국의 배들은 중무장한 채 사람을 많이 태우고 지중해에 가는 목적으로 튼튼하게 건조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네덜란드 선박들은 최소의 선원으로 최대의 경제효과를 얻는 데 초점을 맞춰 개발되고 있었다. 이는 곧바로 화물유통 경쟁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특히 다수의 사람이 배의 소유권을 나눠 갖는 네덜란드만의 관행은 배의 건조비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됐다. 1598년 벨기에 앤트워프(Antwerp)에서 멀리 아시아로 출항한 22척의 함선 중 무사히 귀환한 것은 12척에 불과했을 만큼 여전히 원거리 교역은 ‘위험한’ 일이었다. 함선의 소모가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네덜란드 조선 경쟁력의 위상은 더욱 높아진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세워진 세계 최초 주식회사 동인도회사 조선소의 전경.
네덜란드는 청어를 배 위에서 염장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이후 조선업·해운업이 크게 발달했다.
소금 확보 위해 대서양 건너 카리브해 진출

물론 네덜란드의 사업에는 위기와 저항도 적지 않았다. 17세기 에스파냐(스페인) 합스부르크와 네덜란드가 대립하면서 에스파냐가 네덜란드 선박에 대한 엠바고(선박의 억류 혹은 통상금지)를 실시했다. 이베리아반도산 소금 무역에서 네덜란드 상인이 축출된 것이다. 하지만 이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려던 영국과 한자동맹 상인들은 선박 부족으로 제대로 소금 무역을 실시하지 못했다. 결국 북유럽에서 소금 부족 현상만 심해지고 소금 가격이 급상승하는 부작용만 나타났다.
네덜란드라고 마냥 성공만 한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는 1598~1607년 대서양 건너 카리브해까지 진출, 고급 소금을 구해 네덜란드 항구로 귀환한 뒤 교역을 재개한다. 하지만 에스파냐 합스부르크는 이런 네덜란드의 탈출구마저 봉쇄해 결국 카리브해 소금 유입이 줄어들고 이는 발트해 무역 감소와 청어 어업에 대한 타격으로 이어진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소금을 얻기 힘들어지자 네덜란드는 1621년 이후 포르투갈산 소금 교역 비중을 줄이는 대신 서프랑스산 소금으로 대체를 시도한다. 하지만 프랑스산 소금은 마그네슘 함량이 높아서 생선 저장용으로 부적합했고, 스칸디나비아와 네덜란드의 ‘청어항’ 등에서 수요를 맞추지 못하는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영국의 헤게모니 장악

후발국 영국의 도전도 한동안은 성과가 나지 않았다. 영국이 나름 노력해 우위를 차지한 분야도 과실은 네덜란드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교역이 대표적이다. 1660년대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은 다이아몬드 원광석 거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았지만 결국 이들 다이아몬드의 기착지는 네덜란드 지역이었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온 다이아몬드 원광석들은 18세기까지 대부분의 경우 재수출돼서 암스테르담에서 가공됐다. 다이아몬드를 연마하는 하이테크 분야에서 네덜란드가 주도권을 상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네덜란드와 정면 대결을 택한 잉글랜드가 항해법(항해조례)으로 영국 배의 네덜란드 상품 운송을 금하지만, 그 조치로 인한 타격은 단기적으로는 영국이 더 컸다. 네덜란드의 보복대응책으로 영국 무역과 운송은 더 취약해졌고 발트해와 지중해로 가는 물량이 마비됐고, 영국 동인도회사 무역도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영국이 네덜란드를 제치고 무역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 원인은 양국 간 해군력의 차이나 잉글랜드가 다른 나라들과 협공을 통해 네덜란드를 공략한 데 따른 복합적 결과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