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세계무역의 위기와 한국인 최초 WTO 사무총장의 의미

정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위원,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세계경제의 마이너스 성장이 전망되는 가운데 코로나19의 팬데믹은 끝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화와 글로벌 가치사슬 및 무역의 확대가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으나 최근에는 오히려 탈세계화(Deglobalization)와 탈동조화(Decoupling) 현상으로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특히 글로벌 위기에 대응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WTO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다자무역체제의 핵심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7월 16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WTO 본부에서 사무총장 후보자 정견 발표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지난 5월 호베르투 아제베두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잔여 임기 1년을 남기고 전격적으로 사임 의사를 발표했다. 아제베두 사무총장은 2013년 9월 취임한 이후 2017년 연임에 성공한 바 있다. 현직 사무총장 중도 사임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아 WTO는 차기 사무총장 선출기간을 단축하고 다른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오는 11월까지 절차를 마무리하여 사무총장의 공백기를 최소화할 계획이다. 7월 8일까지 한 달간 접수를 받은 결과, 최종적으로 8명이 입후보한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산업통상자원부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 출사표를 던지고 제네바에서 개최된 WTO 일반이사회에서 정견 발표를 통해 WTO의 기능 복원과 신뢰 회복을 강조했다. 그동안 공직에서 줄곧 통상업무를 맡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통상전문가인 유 본부장의 출마로 우리나라는 WTO 사무총장 선거에 세 번째 도전한다. 1994년과 2012년, 김철수 전 상공부장관과 박태호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각각 나섰으나 선출되지는 못했다.

위기의 WTO, 세계경제 위기와 다자주의의 위축

1995년 출범한 WTO는 지난 25년간 다자무역체제의 근간이 되는 국제기구로서 역할을 수행해왔으나 최근 보호무역주의와 회원국 간 갈등 심화로 기능이 약화되면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특히 WTO 내 대법원 역할을 하는 상소기구의 위원 7명 중 6명이 공석이 되면서 상소기구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래 WTO 상소기구의 판결에 대한 비판과 문제점을 지적해온 미국이 그동안 임기가 만료된 상소기구 위원을 대체할 새로운 위원 선임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소기구 위원을 임명하려면 현재 WTO 회원국인 164개국이 전원 동의해야 한다. 한편 WTO의 입법 기능이라고 할 다자간 무역협상인 도하개발어젠다(DDA; Doha Development Agenda)는 2001년 야심차게 협상을 시작하였으나 선진회원국과 개도회원국 간 대립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WTO의 행정 기능인 무역정책검토(TPR; Trade Policy Review) 제도는 동료 회원국의 검토와 압력(Peer Review, Peer Pressure)을 통해 해당 국가의 무역정책과 관행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해왔으나 최근 들어 검토주기는 더 길어지고 강도는 과거에 비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WTO의 사법·입법·행정, 세 가지 기능이 난항을 겪으면서 WTO가 총체적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위기의 WTO가 직면한 세계경제와 국제무역 환경도 녹록지 않다. 무엇보다 세계경제에 드리운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짙고 터널의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IMF 연구진에 따르면 최근 1~2년 사이 경제정책불확실성지수(Economic Policy Uncertainty Index)는 물론 세계통상불확실성지수(World Trade Uncertainty Index)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바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계경제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침체를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보호무역주의와 무역분쟁은 확산하는 추세에 있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 정부가 확장적 재정 및 통화 정책을 적극 활용하여 대응하고 있으나 대봉쇄(Great Lockdown)로 인한 세계 각국의 국경폐쇄는 인력이동의 제한과 생산 및 소비 위축을 동반하면서 특히 국제무역에 부정적인 영향이 우려된다. 실제로 WTO는 올해 세계무역이 시나리오에 따라 적게는 13%, 많게는 32% 감소할 것으로 전망한다.

호베르투 아제베두 사무총장의 중도 사임 발표 이후 새로운 사무총장 선출을 앞두고 있는 세계무역기구(WTO).
차기 WTO 사무총장, 다자무역체제 기능 복원이 급선무

이처럼 세계경제와 다자무역체제의 위기상황에서 WTO 사무총장의 역할과 책무는 막중하다. WTO가 안고 있는 산적한 현안 해결과 다자무역체제의 정상적 기능 복원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회원국 간 갈등 해소와 무역의 포용성 증진, WTO 개혁을 통한 신뢰 회복과 디지털 전환을 포함한 미래비전 제시가 결코 쉽지 않지만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WTO 사무총장으로서 회원국과 사무국의 협조를 이끌어내고 해법을 찾아야 하는 주요 과제들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위치한 사회학 연구기관인 유럽대학연구소(EUI; European University Institute)의 버나드 호크만 교수팀이 7월에 발간한 <차기 WTO 사무총장에 대한 이해관계자의 선호도와 우선순위>에 따르면 차기 사무총장이 갖추어야 할 주요 덕목으로 조직관리 및 정치 경력과 WTO 협상 경험, 경제학적 전문성, 국제 네트워크와 인맥 등이 꼽힌다. 이는 WTO 회원국의 제네바 소재 대표단과 회원국들의 통상 관료 및 전문가 1,092명을 대상으로 지난 6월 5일부터 21일까지 실시한 설문조사에 기초한 분석결과다.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이번 선거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대륙별 지역안배 문제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다. 일부 회원국을 중심으로 이번에는 그간 한 번도 WTO 사무총장을 배출한 적 없는 아프리카 차례라는 얘기가 초반부터 나왔고, 실제 이번 선거에 입후보한 8명 중 3명이 아프리카 회원국 출신이다.

국제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발표하고 있는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

이와 관련해서 전문성과 능력만으로 사무총장을 선정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응답자가 70%로 가장 높았고 지역 다양성도 고려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비율은 60%로 나타났다. 한편 아프리카 지역 응답자는 전문성(60%대)보다 지역 다양성(95%)을 고려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비율이 훨씬 더 높게 나왔다. 선진국과 개도국이 번갈아 사무총장을 맡아야 하는지와 3대 무역대국인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출신 후보를 배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동의하는 답변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결국 설문에 참가한 통상관료와 전문가들은 WTO 사무총장 후보의 자격요건에 대해 장기적으로 지역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출신 대륙 또는 국가를 이유로 제한을 두거나 편향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우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역대 WTO 사무총장

순번 임기 성명 출신국
1대 1993~1995 피터 서덜랜드 아일랜드
2대 1995~1999 레나토 루지에로 이탈리아
3대 1999~2002 마이크 무어 뉴질랜드
4대 2002~2005 수파차이 파닛차팍 태국
5·6대 2005~2013 파스칼 라미 프랑스
7·8대 2013~ 호베르투 아제베두 브라질
※아제베두는 2021년 8월 말까지 임기였으나, 2020년 8월 말 조기 사임 표명

사무총장 선출 과정

  1. 후보 등록
  2. 선거 운동
  3. 164개국 선호도 조사
  4. 최후의 1인
  5. 사무총장 선출
한국인 사무총장 배출 시 국제적 위상과 국가 브랜드 가치 높이는 기회

1995년 WTO 출범 당시만 해도 무역자유화와 산업화에 방점을 둔 세계화의 시대였다면 지금 우리는 디지털화 시대를 살고 있다. 산업화와 세계화 시대를 거치면서 불평등이 확대되었다는 주장에 근거하여 늘어난 보호무역주의와 탈세계화, 지정학적 갈등과 안보 문제, 기술패권 경쟁의 심화는 국제통상 환경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편 코로나19로 디지털 기술과 비대면 서비스에 대한 수요 및 활용이 급증하면서 세계적으로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의 가속화와 글로벌 가치사슬의 재편이 촉진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다자무역체제의 정립과 미래지향적인 국제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무역입국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고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다자체제를 통한 무역자유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하는 한국에서 WTO 사무총장이 배출된다면 그 의미는 남다르다. 한국은 반세기 만에 세계 최초로 원조 수여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된 나라이자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발돋움했으며 다자무역체제의 모범국가이자 자유무역협정(FTA) 허브를 구축한 세계무역의 중견국가로 성장했다. WTO의 존폐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주요 회원국 및 선진국과 개도국 간 갈등을 중재하고 실효적인 합의를 도출해내는 능력과 중간자적인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이번 선거에서 한국이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 이유이자 일본의 반대 가능성과 선출과정에서의 험로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최초 WTO 사무총장 배출에 대한 기대가 큰 이유다. 유 본부장이 당선된다면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경사이자 다자무역체제 발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차기 사무총장에 도전하고 있는 주요 후보들.
윗줄 왼쪽부터 유명희(한국), 하미드 맘두(이집트), 아미나 모하메드(케냐), 무함마드 마지아드 알투와이즈리(사우디아라비아). 아랫줄 왼쪽부터 리엄 폭스(영국), 투도르 울리아노브스키(몰도바), 응고지 오콘조-이웰라(나이지리아), 헤수스 세아데(멕시코).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6월 24일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기자실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 출마 브리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기구 수장을 배출하는 데 개인적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젠 통상이 더 이상 통상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건, 기술, 안보 등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EUI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대부분은 차기 WTO 사무총장의 과제로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기후변화, 전자상거래 협상 타결 등을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범정부적이고 국가 차원의 지지와 지원이 필요한 이유다. 다자무역체제의 질서를 회복하고 디지털 전환을 준비하는 WTO 2.0 시대를 열어갈 한국인 최초 WTO 사무총장 배출을 기대하고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