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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무역질서와 붉은 여왕의 역설

“여기에서는 같은 자리에 있으려면 힘껏 달려야 해.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한단다.”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주인공 앨리스에게 하는 말이다.
최소한의 생존만을 위해서도 남들만큼 달려야 한다는 의미로 ‘붉은 여왕의 역설’이라고 불린다. 이는 자유무역협정(FTA)이 대세가 된 지 오래인 오늘날 세계무역 질서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각국이 경쟁적으로 FTA 대상 국가를 늘려가면서 다른 나라 이상으로 자유무역의 수혜를 누리려면 더 많은 FTA가 필요하게 됐다.

FTA는 두 개의 국가 혹은 경제권이 서로의 시장을 개방한다는 약속을 의미한다. 협상 내용에 따라 농업 등 특정 시장이나 재화가 개방 대상에서 제외될 수도 있고, 관세율을 일부 낮추는 등 개방 정도를 차별화할 수 있다. 협상에 따른 수혜는 협상 당사국에만 적용되는 만큼 FTA를 맺지 않은 국가에는 무역장벽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결과가 빚어진다.
FTA를 통해 거래되는 교역량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50%를 넘었다. 새로운 집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11년이 지난 만큼 FTA 체결국 간 거래가 그렇지 않은 무역규모보다 훨씬 클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FTA를 전혀 체결하지 않았거나 체결 FTA가 적은 나라는 불리한 위치에서 세계무역에 나설 수밖에 없다. FTA는 개별 국가경제가 무역으로 성장하기 위해 꼭 체결해야 할 필수조건이 됐다.

2004년 한-칠레 FTA로 시작, 16건 56개국 체결

이처럼 대세가 된 FTA는 2000년 이전만 해도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생소한 단어였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FTA와 같은 양자협상보다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시장을 여는 다자협상을 중심으로 무역개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체제하에서 이뤄진 우루과이라운드(UR)가 다자협상의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 같은 무역협상 구조는 21세기 들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2001년 카타르 도하에서 시작된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WTO 회원국 간 이견으로 좀처럼 진전되지 않은 것이다. 당초 2005년까지 기존 우루과이라운드보다 한층 개방된 포괄적인 협정을 도출할 예정이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뚜렷한 돌파구가 열리지 않고 있다.
이처럼 난관에 부딪힌 DDA를 대신해 부상한 것이 FTA다. 여러 나라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한꺼번에 조율해야 하는 DDA와 달리 FTA는 양자 간 이해관계만 맞으면 돼 협상이 쉽다. 한국이 2004년 칠레와의 FTA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16건 56개국을 체결(발효 기준)하게 된 배경이다.

다가오는 과제, FTA의 진화 그리고 발굴

세계 FTA 시계는 코로나19 확산에도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다. 9월 11일 체결한 영국과 일본의 FTA가 대표적이다. 유럽연합(EU) 탈퇴로 EU가 다른 나라들과 체결한 FTA 효과를 누리지 못하게 된 영국이 서둘러 주요국들과 FTA를 체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영국과 FTA를 체결했다. 해당 협정은 영국의 EU 탈퇴가 현실화되는 즉시 발효된다.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 등 중미 4개국과의 FTA가 발효됐으며 연내에 파나마까지 발효되면 5개국으로 구성된 중미 공화국 간 한-중미 FTA가 완성된다. 아시아에서 이들 국가와 FTA를 체결한 나라는 한국이 처음이다. 2015년 협상을 시작해 2018년 2월 협정문에 사인한 것으로 각국 국회의 비준을 받는 과정에서 실행이 늦어졌다. 이번 FTA 발효로 한국 기업들의 상품 및 서비스, 투자 등의 기회가 한층 넓어지게 됐다. 주요 수출품목 중에서는 자동차와 관련 부품이 가장 큰 수혜를 누릴 전망이다.
지금까지 한국이 체결한 가장 중요한 FTA는 2011년 국회에서 비준한 한미 FTA다. 그렇다면 현재 진행 중인 FTA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국과 중국, 일본이 협상하고 있는 한중일 FTA라는 데 큰 이견이 없다.

아·태지역 경제 통합 현황

2012년부터 협상을 시작해 이후 16차례에 걸쳐 협상을 벌였다. 한중일 3개국의 국내총생산(GDP) 총합이 EU와 비슷해 3개국 사이의 FTA가 타결된다면 새로운 거대 경제권이 탄생하게 되는 셈이다. 한국 경제에도 10년간 1% 이상의 GDP 증가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연내로 예정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때도 중요한 국가 의제로 다뤄지는 등 꾸준히 논의 중이다.
FTA는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빠지면서 새로 만들어진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중국이 공을 들이고 있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단순히 2개 나라가 서로의 시장을 개방하는 것을 넘어 10개 안팎의 나라가 참여해 한꺼번에 무역장벽을 허무는 형식이다. 하지만 역시 참가국이 늘면서 DDA처럼 협상이 좀처럼 타결에 이르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정치·경제적 긴장이 높아지면서 어떤 협정에 들어가는지가 무역을 넘어 정치적인 의사 표시로 받아들여지는 상황도 우려되고 있다. 무역협상 구조의 변화에도 한국이 신규 FTA 발굴을 통한 시장개척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