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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수교 30년, 교역 규모 10위로 성장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30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양국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결실을 거두었다. 이듬해 소련 연방이 붕괴하고 러시아가 이전 외교관계를 승계하면서 자연스럽게 한-러 수교로 이어졌고 이 같은 관계는 올해 30주년을 맞았다.

20세기 초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긴밀하던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일제강점기와 공산혁명 등 정치적인 요인으로 오랜 기간 단절됐다. 1990년 수교 이후 30년간 양국 관계는 여러 영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무역과 통상 영역에서도 러시아는 중요한 파트너로 부상했다. 1990년부터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까지 통계를 내보면 교역 규모 성장은 20배 이상으로 같은 기간 한국의 세계 교역 증가속도 6.4배를 크게 넘어선다. 금융위기로 반 토막 났던 교역은 이후 급증해 2014년에는 258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수교 첫해 23위였던 러시아 교역 규모는 지난해 10위로 올라섰다.

교류폭 요동쳐도 투자 규모 꾸준히 늘어나

한-러 수교 이래 한국은 자동차와 휴대폰 등 공산품과 라면 및 의류 등을 수출하고 있다. 한류와 K-Pop(K팝)에 대한 인기도 높아지면서 화장품 수출도 늘어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는 원유와 유연탄 등을 주로 수입하고 있으며 어류 및 목재 등의 수입도 차츰 늘어나고 있다. 무역수지는 지난해 68억 달러 적자로 한국이 러시아에서 더 많은 물품을 구매하고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분쟁을 기점으로 시작된 서방의 경제 제재로 러시아 경제 전반이 침체에 빠진 데다 루블화 가치가 하락하며 구매력이 떨어진 데 따른 결과다.
그럼에도 한국 기업들은 2000년 이후 러시아 시장 공략을 위해 현지 투자를 늘려왔다. 러시아에 대한 한국의 누적 투자액은 28억400만 달러에 달한다. 현대자동차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자동차 공장을 짓고, 삼성전자와 LG전자 역시 가전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오리온은 초코파이공장, 한국야쿠르트는 라면공장을 건설했으며 롯데백화점 모스크바 지점도 문을 열었다. 다만 경제 제재 여파로 2014년 이후 러시아에 대한 투자는 30% 가까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한국 투자액은 7,004만 달러로 한국의 러시아 투자 대비 40분의 1에 불과하다.
2014년에는 양국 간 비자 면제 조치도 이뤄지며 인적교류도 급증했다. 수교 초기 10만 명 정도이던 상호 관광객은 2000년 이후 2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지난해에는 77만 명으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한국을 찾은 관광객이 10번째로 많은 나라가 러시아다. 2018년에는 사상 최초로 러시아를 찾은 한국 관광객이 러시아에서 온 관광객보다 많았다.
이처럼 한-러 수교 이후 30년간 러시아와의 교역과 교류는 계속 증가해왔다. 하지만 정치적 원인과 루블화 가치 급등락 등 여러 요인에 따라 교류폭도 요동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새로운 경제적 기회 모색, 통상협력 강화로 열매 맺어

이런 가운데에서도 양국은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교 이후 31차례에 걸친 정상회담을 통해 기술협력부터 기간산업 건설까지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특히 에너지 분야의 협력은 잠재력이 높은 분야로 꼽힌다. 러시아는 유럽에 편중된 에너지 수출을 다원화하고, 한국으로선 수입선 다변화 효과가 있다. 한국과 비교적 가까운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층이 녹으며 신규 가스전이 속속 개발되고 있어 경제적 우위도 있다.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과정에서는 북한과 교류를 확대할 수 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남북을 관통하는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유라시아 육로 구축사업, 북한을 경유하는 송전선 연결사업 역시 경제는 물론 정치·국방에도 큰 영향을 줄 만한 인프라 사업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이점은 사업의 장애물로도 작용해 대북 관계에 따라 러시아와 자원 관련 협력도 난관에 부딪히는 일이 잦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은 러시아와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2017년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설치했다. 러시아도 2012년 극동개발부를 신설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이 같은 양국의 노력은 통상협력 강화로 열매를 맺고 있다. 2016년에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이 참여한 유라시아경제연합과 한국 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협의회가 개최됐다. 2019년부터는 한-러 FTA 체결을 위한 협상이 다섯 차례에 걸쳐 있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제재가 장기화되며 러시아가 중국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은 한-러 교역에도 부정적이다. 중국은 2008년 이후 러시아의 최대 수입국으로 올라서며 지난해 중국 상품의 점유율을 22.2%로 끌어올렸다. 이에 따라 2006년 4.9%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한국 상품의 점유율은 지난해 3.3%까지 떨어졌다. 경제 제재로 사업 여건이 어려워지는 상황에서도 중국산 공세에 맞서 러시아 시장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과 관련해 전략을 재정비할 필요도 시급하다. 5월에 하루 1만 명씩 확진자가 발생하던 러시아에서는 8월 이후에도 일 4,000~5,000명의 확진자 증가가 유지되며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여기에 유가 급락 등이 겹치며 내수시장이 크게 침체되고 있다. 이에 따른 수출 감소는 불가피하지만 전자상거래 시장이 활성화되고 한국의 대러시아 수출품목 중 하나인 의료기기 수요가 늘어나는 등 기회도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30년간 다져온 양국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