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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통상 규범의 국제 논의와 한국의 대응전략

권병규 법무법인 청현 외국변호사(미국 뉴욕주)·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위촉 대외경제전문가(디지털 통상) 사진한경DB

디지털 통상은 금융, 교육, 정보처리 등 서비스업뿐만 아니라 제조업의 연구개발(R&D), 제조공정 등에 관한 데이터 거래에 이르기까지 범위를 넓히면서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디지털 통상의 개념과 중요성이 부상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짚어보고 세계무역기구(WTO) 전자상거래 협상 등 글로벌 디지털 통상을 둘러싼 이슈에 대한 우리의 대응책과 향후 우리나라가 디지털 통상 강국으로서 국제적 위상을 다져나가기 위해 필요한 전략은 무엇인지 고찰해본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 디지털 무역협정을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지난 7월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각료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모습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디지털 경제는 디지털 기술·인프라·서비스 및 데이터를 포함하는 디지털 투입(Digital Inputs)에 의존하거나 또는 그에 의해 고도화되는(Enhanced) 모든 경제활동을 포함하며, 그 수행 주체를 불문한다. OECD는 디지털 경제를 거래 특성상 “디지털로 주문되거나 디지털로 배송되는 경제활동”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이 경우 디지털 경제는 매우 포괄적이다. 오늘날 주문과 배송이 모두 오프라인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과 온라인 활용이 보편화돼 있는 국제무역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디지털 경제의 개념은 디지털 통상(Digital Trade)의 범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최근 디지털 통상 규범의 적용 범위가 디지털 경제하의 국제무역에 영향을 미치는 조치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OECD의 디지털 경제 정의

디지털 사회(Digital Society)
디지털 경제 측정 광의(broad) 기타 디지털 투입에 의존하거나 디지털 투입에 의해 유의미하게 고도화되는 활동
협의(Narrow) 디지털 투입을 통해 유의미하게 고도화되는 생산자의 경제활동 Significantly Enhanced
핵심(core) 디지털 투입에 의존하는 생산자의 경제활동 Reliant
ICT 상품, 서비스 및디지털 콘텐츠 생산자의 경제활동
디지털 방식으로 주문되거나 배송되는 경제활동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국가 간 교역활동

디지털 통상은 일반적으로 국가 간 전자상거래(e-commerce)와 혼용되는 용어로서, 국제적으로 합의된 단일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1998년 WTO가 채택한 ‘전자상거래 작업계획’은 전자상거래를 “전자적 수단에 의한 상품 및 서비스의 생산, 유통, 마케팅, 판매 또는 배송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미국국제무역위원회(USITC)는 2013년 주문, 결제, 배송 등 재화의 모든 거래 단계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전자상거래를 디지털 통상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협소한 정의는 2014년 좀 더 넓은 개념인 “상품 및 서비스의 주문, 생산 또는 배송에 있어서 인터넷 및 인터넷 기반 기술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래”로 확장되었다.
한편 OECD는 2011년 주문 등 재화의 거래단계 일부만 컴퓨터 네트워크로 이루어지면 실제 결제나 배송이 오프라인에 의하더라도 전자상거래에 해당된다고 포괄적으로 정의했다. 즉 OECD가 정의한 광의의 디지털 통상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배송되는 전자책, 소프트웨어, 콘텐츠, 데이터는 물론이고, 디지털에 의해 가능해지고(Enabled) 물리적으로(Physically) 배송되는 상품과 서비스를 모두 포함한다.
즉 디지털 통상에서의 ‘디지털’은 한편으로는 디지털 콘텐츠라는 전자상거래의 대상(Objects)을, 다른 한편으로는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상품·서비스 무역을 뒷받침하는 디지털 네트워크 및 기술이라는 온라인 수단(Means)을 의미하는 다면적 용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디지털 통상은 데이터, 디지털 플랫폼 및 통상 규범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에 가깝다. 최근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도입된 디지털 통상 규범이 디지털 경제를 구성하는 개인정보, 디지털 플랫폼 등 핵심 요소들에 대한 국제 모범관행규약을 제정하는 추세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정부가 디지털 통상을 “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ICT) 등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국가 간 교역활동(상품+서비스+데이터) 전반”이라고 규정한 대목은 고무적이다.

한국의 디지털 통상 협상, 양자 및 다자 협상 병행

우리나라가 체결한 FTA는 현재 총 21건이다. 이 중 17건의 FTA는 발효된 상태이며, 4건의 FTA가 서명 또는 타결돼 발효를 앞두고 있다. 발효된 17건의 FTA 중에서 전자상거래 규정을 두고 있는 FTA는 11건이다. 이 중 9건의 FTA는 별도의 전자상거래 챕터를 두고 있고, 2건의 FTA는 전자상거래 조항을 두고 있다.
한·미 FTA(2012.3.15 발효)는 전자상거래에 대해 가장 상세한 규범을 채택하고 있다. 한·미 FTA 전자상거래 챕터는 9개 조항으로 구성돼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디지털 제품에 대한 무관세, 디지털 제품 비차별, 전자인증 및 전자서명, 온라인 소비자 보호, 종이 없는 무역, 인터넷 접근 및 이용에 관한 원칙과 국경 간 정보 이동 등이다. 한·미 FTA는 이후 디지털 통상 협정과 비교하면 규범의 구체성이나 포괄성 차원에서 부족함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인터넷 접근 및 이용에 관한 원칙을 통해 소비자의 선택과 시장의 경쟁을 보장한 점, 국경 간 정보 이동과 개인정보의 중요성을 인정한 대목은 디지털 통상에 관한 선도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미 FTA 전후의 FTA에서 디지털 통상 규범들은 대체로 한·미 FTA와 큰 차이가 있지 않다. 다만, 여타 FTA에는 최신 디지털 통상 협정의 일부 내용이 협력 조항으로 추가돼 있다.
다자 차원에서는 2017년 WTO 제11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WTO 차원에서 디지털 통상 규범 마련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에 우리나라는 2018년 4월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 내에 디지털경제통상과를 신설하고 디지털 통상 정책 수립과 규범 협상을 전담하도록 했다. 2019년 4월 WTO 전자상거래 협상 참여를 공식 발표했고, 한 달 뒤부터 WTO 전자상거래 협상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동 협상에 16개 조항의 제안서와 수차례의 공동선언문을 제출하는 등 협상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WTO 전자상거래 협상과 병행해 FTA 차원의 디지털 통상 규범 마련에도 주력하고 있다. 2020년 6월 우리나라의 제12위 교역국이자 디지털 수준이 우리나라와 유사한 싱가포르와 한·싱 디지털동반자협정(DPA; Digital Partnership Agreement) 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공청회를 개최해 국내 의견 수렴 절차를 마친 바 있으며, 올해 안에 협정 체결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또한 싱가포르·칠레·뉴질랜드 간에 체결한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 Digital Economy Partnership Agreement, 2021.1.7 발효) 참여를 위해 지난 5월 공청회를 개최했으며, 조만간 기탁국인 뉴질랜드에 가입 의사를 공식 통보할 계획이다. 영국, 캐나다, 호주 등도 참여 의향을 표명한 DEPA는 향후 디지털 통상 규범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가능성이 높은 협정이다. 지난 9월 대외경제전략 관계장관회의에서도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위한 국내외 여건 점검과 향후 계획을 논의하는 등 주도적인 디지털 통상 협상 참여를 위반 준비작업을 착실히 진행 중이다.

WTO 전자상거래 협상 논의 주제

큰 주제
① 디지털 통상 구현 (Enabling Digital Trade/e-commerce)
② 개방과 디지털 통상 (Openness and Digital Trade/e-commerce)
③ 신뢰와 디지털 통상 (Trust and Digital Trade/e-commerce)
④ 공통 이슈 (Cross-Cutting Issues)
작은 주제
종이 없는 무역, 전자결재, 전자서명과 계약, 전자 전송 무관세
시장접근, 국경 간 정보 이전, 컴퓨팅 설비 현지화, 비차별
시장접근, 국경 간 정보 이전, 컴퓨팅 설비 현지화, 비차별
투명성, 개발 (인프라와 디지털 격차), 협력
글로벌 디지털 통상 규범의 제정

디지털 경제의 발전은 경제주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탐색비용 및 거래비용의 절감, 새로운 시장으로의 진출 기회 확대 등 다양한 혜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통상의 규모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2020년 기준 세계 전자상거래 소매시장 규모는 4조2,800억 달러 규모로 전년 대비 27.6% 증가했고, 우리나라의 전자상거래 규모는 161조 원 규모로 전년 대비 19.3% 증가했다. 디지털 통상의 규모가 아직 독립된 통계로 제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디지털 통상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교적 분명하다.
그에 비하면, 디지털 통상 규범의 진전 속도는 빠르지 않다. 오프라인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통상 규범에서 온라인 무역에 관한 디지털 통상 규범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에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최근 일련의 FTA를 통해 디지털 통상 규범이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WTO도 현재 디지털 통상 규범 제정을 위한 논의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1995년 출범한 WTO체제의 다자무역협정은 상품무역협정(GATT 1994 포함), 서비스무역협정(GATS), 지식재산권협정(TRIPs) 등 3개 축(Pillars)으로 구성돼 있다. WTO체제 출범 이후 뒤늦게 국가 간 전자상거래의 중요성을 인지한 WTO가 1998년 제2차 WTO 각료회의를 계기로 전자상거래 작업계획(Work Programme on e-commerce)을 가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한시적인 ‘전자적 전송에 대한 무관세 모라토리엄(Moratorium)’으로 보잘것없었다. 즉 디지털 통상과 관련한 별도의 다자무역협정은 여전히 부재한 상태다.
미국 등 주요국이 디지털 통상 규범 수립을 위해 선택한 대안적 방법론이 FTA다. 미·요르단 FTA(2001.12.17 발효)는 최초로 전자상거래 조항을 두었고(제7조), 싱가포르·호주 FTA(2003.7.28 발효)를 통해 비로소 전자상거래 챕터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특히 디지털 경제의 최강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은 디지털 통상 규범 제정을 주도해왔다. 미국은 TPP(미국 탈퇴 후 CPTPP로 변경), USMCA(2020.7.1 발효) 등 복수국 간 FTA를 통해 디지털 통상 규범을 확대·심화시켜왔을 뿐만 아니라, 미·일 디지털무역협정(2020.1.1 발효)과 같이 독립협정의 형식으로 디지털무역협정(DTA; Digital Trade Agreement)을 체결한 바 있다.

한국 체결 FTA 등 디지털 통상 규범 논의 현황
NSCAI 및 무한경계법 핵심 기술 영역 비교
분야 주요 요소 한·싱가포르 한·EU 한·페루 한·미국 한·터키 한·호주 한·캐나다 한·중국 한·베트남 한·콜롬비아 한·중미 CPTTP USMCA
전자상거래
원활화
전자적 전송 무관세 의무 의무 의무 의무 의무 의무 의무 의무(한시적) 의무 의무 의무 의무 의무
디지털 재화 비차별대우 - - - - - - - -
전자서명 및 전자인증 - 협력 협력 의무 협력 - 의무 협력 - -
종이 없는 무역 협력 협력 협력 협력 협력 협력 협력 협력
온라인
소비자 보호
온라인 소비자 보호 의무 - 의무 의무 의무 의무
개인정보 보호 의무 - 의무 의무 노력
스팸메시지 규제 - 협력 - - - 협력 협력
국경 간
디지털
비즈니스
원활화
정보의 국경 간 이전 원활화 - 협력 - - 협력 - -
컴퓨팅 설비 현지화 금지 - -
소프트웨어 소스코드
공개요구 금지
인터넷 접근 및 이용 자유화 협력 협력 협력
인터넷 접속료 분담 -
인터넷 서비스
제공·사용자의 책임 범위
- 의무
자료: ‘디지털 무역 규범 어떻게 형성되고 있나’ 재인용(재단법인 여시재, 2021)

이 가운데 미국 정보통신기술(ICT)업계 요청을 포괄적으로 반영하는 TPP는 디지털 통상 규범 제정과 관련한 중대한 분수령이다. TPP 이전과 TPP 이후 디지털 통상 규범의 모습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TPP 이전 디지털 통상 규범이 대체로 디지털 재화에 대한 무관세 모라토리엄, 디지털 재화에 대한 비차별대우 등을 중심으로 진행돼왔다면, TPP는 복수의 신규 디지털 통상 규범을 도입하고 있다. CPTPP, USMCA, 미·일 DTA조차도 TPP를 모델 텍스트(Model Text)로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미·일 DTA는 유보 목록을 두지 않는 독립협정으로서 협정 당사국의 규제 재량 공간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여타 협정과 차별화된다. DEPA와 싱가포르·호주 디지털경제협정(DEA; Digital Economy Agreement, 2020.12.8 발효)은 미국 이외의 국가들이 주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디지털 경제에 특화된 신규 조항을 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통상 규범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고 있다.
한편 WTO 회원국의 약 66%에 해당하는 회원국 FTA를 통해 디지털 통상 규범 채택의 공감대가 형성됨에 따라 WTO 차원에서도 전향적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2017년 12월 제11차 WTO 각료회의는 “전자상거래 공동선언문”에 기초해 2019년 1월 76개 회원국 참여하에 전자상거래 협상을 시작해 현재 86개국이 디지털 통상 규범 제정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WTO는 29개에 달하는 제안서를 통합해 2020년 12월과 2021년 9월에 통합협상문안(Consolidated Negotiating Text)을 비공개로 발표했으며, 현재 각국의 이견을 조율한 전자상거래협정 통합문안(Consolidated Text) 확정을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이다.
WTO가 당초 목표한 대로 오는 11월 30일에 개최되는 제12차 WTO 각료회의1)에 전자상거래협정(안)을 제출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WTO 전자상거래협정 통합문안은 총 50여 개의 조문으로 구성된 포괄적인 디지털 통상 규범으로서 회원국 간 이견 조율이 문안 완성의 관건이다. 하지만 협상 과정에서 참여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타결 전망을 예단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1998년 제2차 WTO 각료회의 이후 합의돼온 전자적 전송에 대한 무관세 모라토리엄 자체에 대해서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국경 간 정보 이전 보장에 대해서는 미국, 중국, EU의 입장 차이가 첨예하다. 컴퓨팅 설비 현지화 요구 금지, 소스코드 공개 금지에 대해서는 특히 미국 등 선진국과 중국 간에 이해가 상충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올 연말까지 전자서명, 전자인증 등 전자상거래 원활화 분야와 온라인 소비자 보호 등에서만 제한적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1) WTO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 최소 2년마다 개최돼야 하며 WTO 다자무역협정하의 모든 분야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다.
글로벌 디지털 서비스 수출 규모
디지털 통상 확대에 따른 한국의 대응전략
지난 9월 6일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영상회의실에서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간 킴 용(Gan Kim Yong) 싱가포르 통상산업부 장관과 화상회담을 하고 있다.

디지털 통상 규범 제정을 둘러싼 줄다리기 양상은 다면적이다. 디지털 경제의 최강국인 미국을 견제하는 EU,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 디지털 식민지 탈피를 주장하는 개도국 등 디지털 패권 확보 또는 디지털 주권 방어를 위한 국가간 복잡한 역학관계 하에서 제시할 수 있는 한국의 대응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감한 상향식(Bottom-up) 접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우리 기업의 애로를 확인해 이를 디지털 통상 규범 제정 과정에 적극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관련 부처 간 협업 및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동조국과의 공감대 형성은 가시적 성과 거양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둘째, 디지털 통상 확대에 앞서 시장친화적인 국내 디지털 생태계 조성을 위해 적절한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시장친화적 정책기조가 주는 이득이 그에 따른 비용보다 크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디지털 생태계는 EU, 중국, 일본 등 주요국들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은 장점을 내재한다. EU와 달리 경쟁력 있는 토착 플랫폼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해외 디지털 영토를 확장하기에 적합한 개방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과도 비교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문해력(Literacy)은 일본이 부러워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지혜롭게 대응한다면, 얼마든지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잠재 역량을 갖추고 있다.
셋째, 정부는 디지털 통상 규범 제정 과정에서 합법적 정책목표 달성을 위해 예외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규제정책 공간 확보에도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현존하는 디지털 통상 규범은 대체로 주요국 주도로 제정돼왔다. 게다가 주요국이 체결한 FTA상의 디지털 통상 규범은 여타국의 FTA 협상을 위한 모델 문안으로 활용돼온 것도 사실이다. 어찌 보면, 그간의 디지털 통상 규범 제정 과정은 주요국 규제제도의 모심기 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로 인해 이를 수용하는 협상 상대국의 고유한 제도적 유연성이 반영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 간단히 말해, 주요국 규제제도에 근거한 부작위 의무는 원칙 조문으로 채택하되, 협상 상대국이 예외적 상황하에서 동원 가능한 작위 권리는 최대한 허용하지 않는 식이다. 가령 컴퓨팅 설비 위치 요건과 관련해 국내 설치 요건 금지 의무를 원칙으로 하면서, 합법적 정책목표 예외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USMCA가 대표적 사례다. 이는 디지털 통상과 관련된 정당한 규제 주권 행사마저 제약할 수 있는 중대한 위험요소다.
넷째, WTO 전자상거래협정에 관해서도 전략적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동 협정이 얻게 될 법적 지위는 우리나라 디지털 통상의 확장성과 직결된다. 가능한 선택지는 GATT나 GATS와 유사한 지위의 다자무역협정, 정부조달협정(GPA)과 유사한 지위의 복수국 간 협정, 정보기술협정(ITA)과 유사한 지위의 복수국 간 협정, 기본통신 참조문서(Reference Paper)와 유사한 문건 등의 형식이다. 한편 WTO 전자상거래협정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EU가 제안한 통신 참조문서의 수정 채택에 관해서는 세밀한 사전분석 및 심사숙고가 요구된다. 관건은 EU 제안의 정확한 의도다. EU 제안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상당수 국가들이 부가통신서비스로 간주해온 디지털 플랫폼 규제와 직결되는 중대 현안이다. 우리 정부가 좁게는 우리나라의 디지털 통상 활성화를 위해, 넓게는 바람직한 디지털 경제 구현 차원에서 매우 신중한 입장을 정리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EU 규제제도가 우리나라 디지털 생태계에 적합한지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전제로 EU의 모심기에 동참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