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태원 주벨기에 유럽연합대사관 공사참사관
요즘 유럽연합(EU) 관련 뉴스를 접하다 보면 ‘공정한 경쟁의 장(Level Playing Field)’이라는 용어를 자주 듣게 된다. 영국-EU 미래관계 협상의 주요 쟁점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고, 우리나라와 관련해서는 한-EU 자유무역협정(FTA)상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둘러싼 논의 과정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EU와의 현안 관리와 향후 협력관계를 진전시켜나가기 위해서는 EU가 주장하는 ‘공정한 경쟁의 장’ 개념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고 정책적으로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를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정한 경쟁의 장’은 새로운 이슈는 아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 사이 혹은 국가 간에 한정된 자원이나 재화를 놓고 경쟁하는 경우에 이러한 경쟁을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는 주요한 이슈로 논의되어왔으며, 이러한 논의 과정을 거쳐 공정 경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규범화하고 이행을 강제하는 과정이 긴 인류 역사에서 지속되어왔다. 공정한 경쟁은 해당 시기의 사회적 상황과 시대정신에 따라 그 개념이 변화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유럽연합(EU)이 최근 들어 ‘공정한 경쟁의 장’을 강조하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먼저 그동안 공정한 경쟁을 규정해온 개념만으로는 새롭게 등장하는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고, 새로운 상황에 맞게 교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2008~2011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부각된 경제주체 간 불평등 문제 해소 방안을 논의하는 가운데 불공정한 무역관행으로 인한 유럽의 가치 훼손 문제를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국제교역과 관련하여 EU가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중국의 부상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의미에 대해 여러 논쟁이 있지만, 적어도 가입 시점을 전후해서 EU와 미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가 중국이 WTO 가입을 통해 경제적으로 시장경제 시스템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치 시스템의 자유화가 진전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전개된 상황은 이러한 낙관적 기대가 중국의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물론 모든 원인을 중국으로 돌리는 것은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EU를 포함한 주요 교역국들은 중국의 ‘불공정한 무역 관행’에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거대한 중국 시장이 제공하는 기회를 활용하는 데 더 관심을 가졌던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문제는 더욱 심화되는 한편, 신장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영향력은 확대되어 문제 해결이 더욱 어려워지는 양상이 지속되어왔다. 더군다나 함께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할 서방 진영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 등장 이후 문제인식의 공유에도 불구하고 방위, 교역 등의 분야에서 갈등을 키워가고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EU 통합을 지탱하는 토대인 ‘유럽 가치’와 ‘단일시장’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고조된 위기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중국이 그동안 축적해온 경제적 힘을 활용하여 금융위기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는 EU 회원국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움직임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Made in China 2025(중국제조 2025)’로 대변되는 중국의 공격적인 산업발전 전략이 EU의 경쟁력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EU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위기감도 공정한 경쟁 논의 촉발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2월 출범한 새로운 EU 집행위원회는 그린딜과 디지털 변혁을 새로운 발전전략으로 제시하였다. 미래전략 산업분야에서 우위를 지켜나가겠다는 것으로 산업정책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신집행위원회가 이러한 정책 우선순위를 발표하면서 ‘지정학적 집행위원회(Geopolitical Commission)’를 천명한 것이다. 경제 문제를 단순히 경제적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여지를 드러냄과 동시에 통상정책을 포함한 모든 EU의 정책 분야에서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즉 가치에 기반한 역내시장을 보호하면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EU가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Strategic Rival)’로 규정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공정한 경쟁의 장’의 대상은 광범위하다. 교역, 노동, 환경, 인권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EU는 그동안 통합을 진전시키는 과정에서 역내의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어 단일시장을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기초가 되는 것은 소위 ‘조화 조항(Harmonization Article)’이라고 일컬어지는 유럽기능조약(Treaty of the Functioning of the EU) 114조다. EU가 독자적 관할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역이라도 단일시장의 기능을 확보하기 위해서 회원국 사이의 법률, 규정, 행정조치의 조화를 추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단일시장 보호를 위해 회원국 사이의 규범 조화와 더불어 단일시장에 대한 역외위협 요인 대응으로 높은 수준의 EU 규범의 대외확산(Externalization of EU Regulations)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요약하자면 ‘공정한 경쟁 이니셔티브’를 통해 단일시장과 EU의 통합 프로젝트를 심화하는 동시에 EU 기업의 대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공정한 경쟁을 실현하기 위한 EU의 움직임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고 실제로 의도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신집행위가 그동안 공정한 경쟁과 관련하여 발표한 정책 등을 통해 그 대강을 가늠할 수 있다.
우선 노동과 환경 등 지속가능개발 이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다. 관세, 비관세장벽 등 전통적인 통상 이슈는 WTO로 대변되는 다자논의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을 통해 자유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으나, 노동과 환경 이슈 등은 각 국가의 고유한 사회경제체제 및 경제발전 단계의 차이 등으로 그동안 다자 혹은 양자 차원의 규범화 노력이 교역 자유화의 진전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노동 분야에서는 주요 교역대상국에 ILO의 핵심협약 비준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캐나다, 일본, 싱가포르, 베트남 등과 체결한 FTA에 이를 반영하고 이행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관련해서는 핵심협약 비준을 둘러싸고 한-EU FTA 협정상의 전문가패널(Panel of Experts) 절차를 진행 중이다.
한편 환경 분야에서는 다자 및 양자 협정의 이행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EU라는 단일시장이 가지는 수출시장으로서의 중요성을 활용하여 유럽 환경규범의 대외 확산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EU가 야심 차게 추진하는 발전전략의 하나인 그린딜 정책의 일환으로 논의되고 있는 ‘탄소국경세(Carbon Border Tax)’를 일례로 들 수 있다. EU 역내로 수입되는 상품에 내재된 탄소배출량에 일종의 관세를 부과하는 메커니즘으로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를 계량화하는 문제, 교역 상대국의 보복조치 가능성 등 다양한 우려가 제시되고 있으나 EU는 이를 도입한다는 방침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ILO 협약 비준과 같이 교역 상대국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나, 탄소국경세의 부과 수준에 따라서는 해당 역외기업의 생산과정은 물론 기업이 속하는 국가의 에너지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EU는 다자 및 양자 협정을 포함한 규범의 집행(Enforcement)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통상총국(DG Trade)에 무역협정의 집행을 담당하는 부총국장(우리 정부의 차관보급에 해당) 직위를 신설하고 반덤핑 등 무역구제와 지속가능개발 이슈 등의 이행문제를 담당하게 하였다. 향후 무역협정의 집행이 EU 통상정책의 주요 의제로 등장하게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울러 WTO를 통한 다자 규범의 정비 노력도 함께 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무역 관행과 관련해 지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어온 국영기업과 보조금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 일본 등과 함께 보조금 관련 WTO 규범의 개정을 추진 중이며, 유사입장국가(Like-minded Countries)의 참여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다.
물론 규범만으로 공정한 경쟁 이니셔티브가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렵다. EU는 산업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구조적 노력도 병행할 것이다. 신집행위가 천명한 바와 같이 산업 구조의 체질을 디지털화하고 친환경적으로 개선하여 산업경쟁력을 유지하고 신산업 발전을 도모하는 노력을 강화해갈 것이다.
향후 EU와의 관계에서 ‘공정한 경쟁의 장(Level Playing Field)’이라는 용어를 교역 관계에서 비교우위 확보를 위한 통상정책 수단으로 좁게 이해하기보다는 그 함의를 정확히 이해하고 접근해나가야 할 것이다. EU의 가장 중요한 성과인 단일시장의 유지 여부와 연결되는 중요한 이슈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하여 EU의 의도에 대해 유럽적 가치의 증진을 위한 순수한 의도로 보는 것이 순진한 접근인 것과 마찬가지로 교역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 효과만 부각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비록 정도에서 차이는 있지만 환경, 노동 등의 이슈와 관련해서는 EU와의 입장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 기준의 강화와 기후변화 정책을 포함한 환경보호는 점차 개별 국가의 정책 분야의 범위를 벗어나 글로벌 공공재의 성격을 띠어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비단 EU만이 사회적·환경적 규범을 무역정책의 목표나 집행의 준거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Robert Lighthizer)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국제관계 잡지인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7-8월 호 기고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통상정책은 미국인의 삶의 방식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역 자유화와 좋은 일자리 창출, 유지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표현은 달라도 사회적·환경적 규범이 향후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어 세계적인 추세로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 경제도 좀 더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모델로 전환하지 않으면 미래의 경쟁력 확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이 저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나가는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