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 광풍부터 암호화폐까지, 투자와 투기를 구분하기 힘든 일들은 역사 속에서 반복을 거듭한다.
그리고 한없이 부풀어올랐던 ‘거품’은 당대인의 삶은 물론 경제사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세기의 천재 아이작 뉴턴으로 하여금 “천체의 움직임까지도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할 수가 없다”고 토로하게 했던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글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중기과학부 부장
투기와 광풍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일은 영국 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름만 ‘남해 버블’이 아니라 ‘미시시피 버블’로 달랐을 뿐이다.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는 프랑스 루이15세의 섭정 오를레앙공에게 접근해 1718년 600만 리브르의 자본으로 프랑스 중앙은행 격인 왕실은행(Banque Royale)을 세웠다. 1719년에는 미국, 인도, 중국에서 무역을 독점하는 서방회사(Compagnie d'Occident, 나중에 미시시피 회사가 됨)를 설립했다. 서방회사와 왕실은행은 주식을 발행하고 이를 국채 인수 대가로 지불할 계획이었다. 국가의 채권자가 주주가 되고 부채는 감소하도록 해서 프랑스 왕실의 재정수요를 충족하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금융기법’이었다. 서방회사는 루이지애나 및 서인도제도와의 교역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배당받을 수 있다고 선전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의 구상대로 화폐주조권과 조세청부권을 부여하면서 날개를 달아줬다. 주당 500리브르인 서방회사의 주가는 투자 광풍이 일면서 1720년 2월에 1만5,000리브르까지 치솟았다. 조직적으로 투기를 자극하고 고배당 전망이 더해지면서 주가가 뛰었다. ‘백만장자’라는 단어가 이때 처음 등장했고, 투자자들이 앞다퉈 주식을 사들였다. 서방회사는 오늘날 루이지애나 등 미국 8개 주에 해당하는 지역의 상업권과 채광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지역 토지는 당시 프랑스 내 토지처럼 부가가치가 크지 않았다.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는 늪지대였던 탓에 초기 식민지 개척자들이 잇달아 목숨을 잃었고, 기대하던 엄청난 규모의 광맥도 발견되지 않았다. 식민지 소유권은 주식을 매입한 사람들에게 약속한 배당금을 지급할 수 있는 만큼의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했다.
존 로는 화폐의 본질이 금이나 은이 아니라 공공의 신뢰라고 믿었고, 프랑스 절대왕정이 그러한 절대적 신뢰를 줄 것으로 봤다. 그러나 서방회사가 수익을 내지 못하면서 존 로와 왕실은행은 화폐 발행을 통해 서방회사 주가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엔 무너졌다. 1720년 10월 1만8,000파운드까지 오른 주가는 순식간에 40파운드 수준으로 떨어졌다. 프랑스 국민에겐 엄청난 투자손실을, 정부에는 막대한 부채를 남긴 채 은행과 회사 모두 문을 닫았다. 존 로의 무모한 시도 덕에 프랑스인들도 지폐와 주식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게 됐다. 거품법이 영국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았듯, 존 로의 도박은 프랑스가 은행업과 주식시장 발전에서 이웃 유럽 국가보다 뒤처지는 원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