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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환경 속 통상규범 개선을 위한 쟁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장기화와 미국의 정권교체, 4차 산업혁명, 여러 나라의 탄소중립 선언. 정치, 사회를 넘어 글로벌 통상에도 영향을 주는 이슈들이다. 국가 간 교역에서 해당 이슈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글로벌 통상규범도 새롭게 정립된다. 특히 사회 및 경제 구조가 급변하는 가운데 통상규범 개선 논의가 꾸준히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때 다뤄질 주요 쟁점들에 대해 짚어본다.

세계 자유무역 질서를 선도하던 미국의 역할이 과거와 다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은 글로벌 통상규범 재정립을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2017년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탈퇴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서는 역할을 줄이는 등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관세 등 무역장벽을 높여 미국시장에 접근하려면 생산기지를 미국에 세우도록 하는 제조업 회귀(리쇼어링) 전략을 취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이 같은 미국의 통상전략은 최근 대선에 따른 정권교체에도 큰 변화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다자간 무역협상 테이블 복귀 전망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대선에서 ‘미국인에 의한 미국 내 제조(Made in all of America, by all of America’s Workers)’라는 경제정책 슬로건을 내세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산 우선구매(Buy American)’가 완제품의 미국 생산을 강조했다면 바이든의 슬로건은 부품·소재까지 국산화하겠다는 것으로 트럼프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다만 중국 견제를 위해 다자간 무역협상 테이블에 복귀할 수 있다는 전망은 제기된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과 함께 우리나라,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가 참여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최근 타결되었으며 중국이 참여하고 있지 않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미국이 가입해 새로운 통상 공동체를 강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디지털 통상의 사각지대

산업 및 소비 구조 변화에 따라 데이터와 소프트웨어를 온라인으로 사고파는 일이 늘고 있지만 여기에 관세를 어떻게, 얼마나 부과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국제 규범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
9월 현재 올해 국내 판매량 1만 대를 돌파한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를 예로 들어보자. 테슬라는 차량과 별도로 차에 탑재되는 소프트웨어(SW)를 판매한다. 수백만 원 상당의 이 SW는 차량 주행을 돕고 각종 편의장치를 이용하는 데 사용된다. SW가 탑재된 차량을 구매하면 국내로 수입될 때 SW를 포함한 전체 금액에 관세가 부과된다. 하지만 일부 구입자들은 차량만 구입한 뒤 관련 SW는 온라인을 통해 다운로드받아 이용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SW 가격은 동일하지만 그에 따른 관세를 지불하지 않아도 돼 그만큼 싸게 살 수 있다. 디지털 통상과 관련된 규범이 확립돼 있지 않아 나타나는 일종의 사각지대다.
이 같은 디지털 통상은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으로 더욱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나라 간 이동이 제한되면서 온라인으로 거래되는 재화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올해 6월부터 싱가포르와 디지털 통상 관련 협상을 처음으로 하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부터 데이터 이동, 핀테크까지 디지털 기술을 중심으로 한 국가 간 교역 전반이 논의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아세안 지역의 물류 및 인프라 허브 역할을 하는 국가라는 점에서 협상 타결에 따른 실효성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첫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상대국인 칠레와의 협상 경험이 이후 적극적인 FTA 협상에 도움을 줬듯이 싱가포르와의 디지털 통상 협상은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등 보다 큰 경제권과 비슷한 협상을 하는 데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새로운 유형의 무역장벽 탄생

EU를 중심으로 디지털세와 탄소세 등 과거에는 없던 다양한 무역장벽이 준비되고 있다는 점도 새로운 글로벌 통상규범에서 풀어야 할 숙제다.
디지털세는 포털과 전자상거래업체 등 플랫폼 사업자의 서비스에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다. 역내에 뚜렷한 토종 플랫폼이 없는 EU가 도입에 가장 적극적이고, 대부분의 글로벌 플랫폼 기업을 갖고 있는 미국은 부정적이다. 미국 주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논의의 진전이 없자 EU 집행위원회는 선제적인 디지털세 도입을 위한 준비작업에 돌입했다.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아시아와 중남미 등에서도 디지털세 도입은 속도를 낼 전망이다. 디지털세가 어떤 방향으로 도입되느냐에 따라 한국의 네이버, 카카오, 배달의민족 등 주요 플랫폼 기업도 영향을 받을 수 있어 한국 정부로서도 중요한 통상 현안으로 부상할 수 있다.
탄소세 도입도 중요한 변수다. 탄소세는 바이든의 공약 중 하나로 자동차와 철강, 석유화학 산업에 중요한 영향을 줄 전망이다. 시행 방향에 따라서는 외국 제품의 수입을 줄이는 통상장벽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EU도 탄소국경세 도입에 나서고 있다. 환경규제 기준을 맞추지 못하는 개발도상국 제품에는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여기에는 자국 기업이 인건비가 저렴한 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지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단순히 통상전략을 넘어 산업 전체가 저탄소 구조로 탈바꿈해야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