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는 기초과학, 한국은 응용과학 분야에서 각각 경쟁 우위에 있다. 두 나라가 과학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하면 시너지가 클 것이다.” 에밀리아 가토(Emilia Gatto) 주한 이탈리아 대사는 양국의 협력 방향을 이렇게 제시했다. 이탈리아는 구찌·프라다·아르마니·베르사체 등의 브랜드로 잘 알려진 명품 패션과 페라리·람보르기니·부가티 등으로 유명한 슈퍼카 그리고 미식과 디자인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최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기자와 만난 가토 대사는 해당 영역에서 ‘메이드 인 이탈리아’ 브랜드의 후광이 워낙 눈부신 까닭에 우주·항공 등 첨단산업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소련과 미국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자체 제작한 인공위성을 우주에 발사한 국가다(1964년 ‘산마르코 1호’). 또한 발사와 운송 시스템, 탐사용 인공위성에 이르기까지 우주·항공 산업 전 부문에 걸쳐 생산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2022년부터 5년 동안 우주 분야에 70억유로의 정부 예산 투입을 예고한 바 있다. 이탈리아 수도 로마의 사피엔차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가토대사는 2023년 9월 주한 이탈리아 대사로 부임하기까지 주사우디아라비아 이탈리아 대사관 경제참사관, 파리 총영사, 뉴욕 주유엔 대표부 일등 참사관, 이탈리아 외교협력부 국장, 주니제르 이탈리아 대사 등을 역임했다. 가토 대사는 “이탈리아의 창의성과 첨단 제조 역량을 한국의 기술력 및 산업 경쟁력과 결합할 수 있는 잠재력이 매우 크다”면서 “이탈리아의 창의성과 첨단 제조 기술이 한국의 기술 리더십 및 산업 경쟁력과 만나는 모든 분야가 협력 유망 분야”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이탈리아 협력, 전반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나.
“양국은 미래 산업 분야 협력 강화를 위해 2025년 9월 서울에서 한·이 비즈니스 포럼을, 그리고 2026년 6월 이재명 대통령의 이탈리아 국빈 방문 기간에 로마에서 한·이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을 개최했다. 이를 통해 농식품과 패션 등 전통적인 협력 분야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는 동시에 첨단 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가까운 미래에 반도체, 인공지능(AI), 산업 자동화, 에너지전환, 인프라, 우주·항공, 생명공학 등의 분야에서 파트너십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과 이탈리아가 경제협력 파트너로서 ‘궁합’이 잘 맞을까.
“이탈리아는 한국을 견고하고 심도 있는 상호 협력 관계를 구축해 나갈 파트너로 본다. 이 대통령과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6월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관계를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한 것은 이 같은 상황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두 정상은 이와 함께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정치, 경제, 과학 기술, 문화·교육, 국방 등 다양한 분야의 양국 간 협력 방안을 이행하기 위한 ‘한·이탈리아 전략적 행동 계획’을 채택했다.”
양국의 상호 협력이 유망한 분야는.
“이탈리아의 창의성과 첨단 제조 역량을 한국의 기술력 및 산업 경쟁력과 결합할 수 있는 잠재력이 매우 크다. 이탈리아는 기초과학, 한국은 응용과학 분야에서 각각 경쟁 우위에 있다. 따라서 두 나라가 과학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하면 시너지가 클 것이다. 우주·항공 분야도 빼놓을 수 없다. 이탈리아 우주산업은 위성과 발사체를 생산하는 업스트림과 위성 영상 및 통신을 서비스하는 다운스트림 등 모든 가치 사슬을 아우른다. 유럽의 대표적인 발사체 중 하나인 ‘베가’도 이탈리아산이다. 이탈리아 최대 방산 업체이자, 글로벌 방산 기업인 레오나르도는 에어버스, 탈레스와 함께 유럽 항공·방산 3대 기업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이탈리아는 또한 국제우주정거장(ISS) 부품40% 이상을 공급한다. 풍부한 경험과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국과 우주 협력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
우리 우주항공청과 이탈리아 우주청은 2025년 5월 상호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면서 우주 환경 탐사, 지구 관측, 위성항법 등 분야에서 협력의 폭을 넓히기로 했다. 레오나르도는 전투기, 헬리콥터, 우주·항공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운용 중이다. 2025년 매출은 약 195억유로였다. 기초과학은 이탈리아 우주산업의 근간이기도 하다. 핵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1971년 최초의 상용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설계한 과학자 페데리코 파진, 복잡계1) 연구로 20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조르조 파리시 등이 이탈리아 출신이다.
한국인과 이탈리아인이 상호 신뢰를 쌓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일단 신뢰가 형성되면 오래 지속되는 탄탄한 파트너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 어떤 분야에서 협력이 유망할까.
“한국이 선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AI와 반도체, 로봇공학 등 분야에서도 혁신 역량을 갖춘 이탈리아의 중소기업과 엔지니어링 기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혁신 기술과 인간 중심 디자인을 결합해 삶의 질 향상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앞으로 매우 중요할 텐데, 그 점에서도 한국과 이탈리아는 이상적인 파트너다. 또한 이탈리아가 높은 경쟁력을 보유한 재생에너지 분야의 협력은 유럽연합(EU)의 탄소 배출 규제 강화 기조 속에서 한국 기업의 유럽 진출 성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 기업이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유럽에 진출하는 건 괜찮은 전략일까.
“이탈리아에 유럽 진출 거점을 마련한 한국 기업은 약 4억5000만 명의 소비자가 있는 EU 단일 시장 접근은 물론 지중해에 있는 이탈리아의 전략적 입지와 물류 인프라, 고도로 전문화된 산업단지 등의 이점도 누릴 수 있다. 이탈리아 이미지가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매우 좋다는 것도 장점이 될 수 있다. 한국 기업이 이탈리아 기업과 손잡고 이들 지역으로 진출할 경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탈리아는 EU 3위 경제 대국이며 서유럽·남유럽·북아프리카·중동을 연결하는 물류·산업의 핵심 허브 역할을 담당한다.”
이탈리아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과 투자자에게 조언 부탁한다.
“차이점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았으면 한다. 한국인과 이탈리아인이 상호 신뢰를 쌓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일단 신뢰가 형성되면 오래 지속되는 탄탄한 파트너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는 고도로 전문화된 산업 클러스터, 혁신적인 중소기업, 첨단 제조 및 생명과학에서 디자인과 농식품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전문성을 갖춘 국가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철저하게 조사해 적합한 현지 파트너를 찾길 바란다. 특히 법률과 세무 비즈니스 분야에서 현지 전문가의 조언은 규제 체계를 잘 이해하고 제대로 된 비즈니스 기회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비즈니스 문화가 한국과 많이 다른가.
“이탈리아에서는 비즈니스 관계에서 개인적인 신뢰와 장기적인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공식 문서나 계약 못지않게 중요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서면 의사소통에만 의존하기보다 대면 회의와 관계 구축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또한 중소기업의 경우 가족 소유이거나 소유주가 직접 경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의사 결정권자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할 수 있다.”
행정절차와 노동법 등은 어떤가.
“이탈리아 노동법은 기간제 계약, 유연근무, 부양 자녀가 있는 직원을 위한 최대 2000유로 비과세 혜택 등 체계적이면서도 유연한 옵션을 제공한다. 특별한 사유를 명시하지 않아도 일반적으로 최대 12개월까지 기간제 고용이 허용된다. 관련 법률 및 단체협약 요건을 충족할 경우, 24개월까지 연장할 수 있다. 규제 승인 및 행정절차에는 시간이 소요될 수 있으며, 지역에 따라 일부 요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원활한 시장진입을 위해서는 초기 단계부터 경험이 풍부한 현지 법률·세무 전문가를 활용하고 준비 기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필수다.”
한국은 EU의 연구 혁신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의 준회원국(associated country)이다.
“한국 기업과 기관은 EU의 대표적인 다자간 연구·혁신 지원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준회원국인 한국은 아시아 최초의 가입국이기도 하다. 한국의 연구자·기업 및 기관은 EU 회원국 기관과 동일한 자격 요건으로 연구비 지원을 신청할 수 있다. 프로젝트 컨소시엄의 일원으로 선정될 경우, 한국 참여 기관은 관련 예산에서 EU자금을 직접 지원받으며, 공동 연구개발(R&D) 프로젝트의 주간사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호라이즌 유럽은 세계 최대 규모의 다자간 연구·혁신 프로그램이다. EU는 호라이즌 유럽에 2021년부터 2027년까지 7년간 총 955억유로 규모의 연구비를 지원한다. EU는 비유럽 지역 6개국에 준회원국 가입을 제안했다. 한국은 2025년 7월 아시아 국가 최초로 준회원국으로 가입해 EU 회원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과제에 참여하고 있다.
추가로 덧붙일 말이 있나.
“내년 8월에 열릴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World Youth Day)를 미래 시장의 초석을 다지는 기회로 잘 활용하기 바란다. 한국과 한국 문화를 동경하는 전 세계 청년이 모여들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도 1만 명이 넘는 젊은이가 참석할 예정이다. 이탈리아 기업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종교적 행사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WYD는 가톨릭교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다. 1985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제정했고,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처음 열린 후 2~3년 주기로 순회 개최한다. 교황이 세계 각국을 찾아가 젊은이를 만나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2027년 서울 대회는 아시아에선 1995년 필리핀 이후 32년 만에 열리는 두 번째 행사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참여국이 150여 개국에 달할 것으로 본다. 개최 도시도 서울을 포함해 전국 15개 지역으로 다양하다.
용어설명
- 1복잡계
수많은 구성 요소가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여, 개별 요소의 단순한 합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거시적 질서나 패턴을 만들어내는 시스템. 완전한 무질서(혼돈)와 완전한 질서(고정)의 중간 상태에 존재하며, 대표적인 예로 인간의 뇌, 생태계, 경제 시장 그리고 거대 사회조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