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특별인터뷰 INTERVIEW 취임 1년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한국, 이제 글로벌 통상 '리더'… 자긍심 큰 만큼 책임감도 막중"
  • 대담=오광진 편집장, 정리=이신혜 기자
  • 서울대 경영학,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MBA, 제36회 행정고시 합격, 전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위원, 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2021~2022년), 전 대통령비서실 신남방신북방비서관, 전 주미국대한민국대사관 상무관

    “글로벌 통상이 위기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많은 나라가 한국의 경험과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느꼈다.”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새로운 통상 질서가 만들어지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회를 찾기 위해 다자 회의 무대에서 글로벌 리더십을 본격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6월 이재명 정부 첫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취임한 여 본부장은 6월 19일 인터뷰에서 지난 1년을 “골포스트가 움직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어떤 위기에 처하면서도 새로운 질서의 패턴을 잡아내서, 적응하면서 기회 요인을 찾아온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위기를 동력 삼아 기회를 만들어 왔다”며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취임 1년을 돌아볼 때 가장 의미 있게 평가하는 성과는.

    “지금은 통상 질서의 판이 새롭게 짜이는 시점이다. 성과라는 말은 본래 안정적인 상황에서 쓰는 용어다. 지난 1년은 끊임없이 위기에 처하면서도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의 패턴을 잡아내 적응하고, 다시 기회 요인을 찾아온 과정이었다. 그 가운데 미국과 합의를 이룬 것을 성과로 꼽고 싶다. 다만 평가 잣대가 달라져야 한다. 트럼프 1기 정부는 지금에 비하면 그나마 안정적이어서 절대평가가 가능했다. 그러나 2기 정부에서 이뤄낸 무역 합의는 상대평가로 봐야 한다. 골포스트가 움직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시절엔 관세가 0%였는데 지금 왜 15%를 받느냐고 절대평가로 따지면, 낙제점이다. 하지만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동시에 관세를 매기는 지금, 우리는 15%로 가장 잘 받은 축에 든다. 다른 나라는 19%, 20% 그 이상도 받는다. 세계 통상 질서의 판이 새로 짜이는 국면에서는 상대평가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유럽연합(EU)과 철강 협상도 마찬가지다. EU가 철강 쿼터를 새로 도입하리라고는 과거엔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EU 역시 미국의 관세 압박 등에 자구책으로 꺼낸 카드다. 

    우리만 EU와 협상한 게 아니라 20여 개국이 함께 줄을 선 가운데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려는 싸움이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상대적으로 선방했다고 본다. 가장 큰 힘은 정상 순방이었다. 정상회담에서 철강 쿼터 협상의 큰 틀이 처음 잡혔고, 그 지침을 받아 양국 통상 장관이 협상에 속도를 냈다.” 여 본부장은 2021년 8월부터 2022년 5월까지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아 트럼프 1기 정부와 통상 협상을 벌인 경험이 있다. 

    지난해 10월 경주 APEC 한미 정상회담에서 관세 협상을 최종 타결했지만, 이후 미국 연방대법원의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 위법 판결과 무역법 301조 조사 등으로 협상이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시각이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위법 판결로 상황이 복잡해진 것은 사실이다. 다만 중요한 건, 우리가 미국과 매우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딜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미국도 그 딜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딜을 지키지 않으면 앞으로 어느 나라가 미국과 협상하려 하겠나. 그런 토대는 깔려 있다고 본다. 물론 계속 소용돌이가 치는 상황인 만큼 긴장을 늦추지 않되,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이재명 정부 초기에 미국과 정말 치열하게 협상하며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뒀다. 그 덕에 미국이 어떤 방향과 의도로 관세정책을 끌고 가는지 늘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고, 우리 입장을 넣을 것은 넣고 있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6월 4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2026 OECD 각료이사회’ 부대 행사로 열린 ‘OECD 각료이사회 세션 6-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투자 회의’를 주재했다. 산업부

    지난 6월 이재명 대통령 유럽 순방을 계기로 우리 5대 교역국 중 처음으로 EU와 디지털통상협정(DTA)에 정식 서명했다. 어떤 의미가 있나.

    “과거의 무역은 물건이 물리적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방식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이커머스(전자상거래)와 플랫폼, BTS 음원 스트리밍처럼 디지털 방식으로 국경을 넘는 유·무형의 제품과 서비스가 무역의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한 기술 발전이 무역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 통상의 ‘게임의 룰’을 누가 먼저 만들어 확산하느냐가 관건인데, 이 영역은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무주공산에 가깝다. 

    우리는 2022년 싱가포르와 처음 DPA를 맺어 발효까지 했지만, 싱가포르는 교역 규모에서 한계가 있었다. 이번엔 세계 2위 경제권인 EU와 협정을 맺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의 소프트파워와 문화 영향력이 커지는 지금, 우리 콘텐츠와 디지털 제품·기술·서비스가 세계시장으로 막힘없이 나아갈 ‘디지털 고속도로’를 유럽과 처음 깐 셈이다. EU로서도 싱가포르에 이은 두 번째 협정이자, 최대 규모 상대다. 이 고속도로를 기반으로 다른 나라로 길을 넓혀갈 계획이다.”

    미·중 중심의 수출 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중견국, 글로벌 사우스와 협력은 어떻게 넓혀가고 있나.

    “다른 나라가 모두 보호무역으로 돌아서더라도 우리는 무역을 통해 성장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다만 소수 시장에 의존하면 그만큼 리스크와 취약성이 커진다. 그래서 어떤 위기가 닥쳐도 제2, 제3의 ‘플랜 B·C·D’를 꺼낼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 지금 당장은 미국·중국·EU 같은 주력 시장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와중에도 미래 시장 개척과 FTA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내가 최근 어디를 다녀왔는지 보면 방향이 보인다. 3주 전 세르비아와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협상을 타결했고, 2주 전엔 모로코와 CEPA 협상 개시에 합의했다. 

    어제 다녀온 몽골과도 CEPA 타결을 추진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발칸반도에서 산업 기반이 탄탄한 나라 중 하나다. 우리 기업이 많이 진출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동유럽이 포화 상태에 이르고 비용도 오르면서, 그 바깥에 있는 세르비아가 새 거점으로 떠올랐다. 모로코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EU·미국과 동시에 FTA를 맺은 데다 자동차 100만 대 생산능력을 갖춰, 아프리카 진출의 교두보로 삼을 만하다. 몽골은 핵심광물 잠재력이 크다. 이렇게 대륙마다 길목이 되는 거점 국가를 미리 개척해 두려는 것이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 범위를 넓히면서 핵심광물이 미·중 전략 경쟁의 핵심 카드로 떠올랐다.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핵심광물 무역 블록 ‘포지(FORGE)’의 의장국이기도 하다.

    “핵심광물은 경제 안보 차원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분야로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핵심광물을 들여와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미드스트림·다운스트림 산업이 강한 구조다. 그래서 광물의 원활한 공급과 수급이 경제는 물론 안보 측면에서도 어느 나라보다 절실하다. 

    지금처럼 한두 나라에 지나치게 집중된 취약한 공급 구조를 중장기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우방국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다. 우리도 이 논의의 테이블에 앉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새로운 구조가 짜이는데 우리만 빠지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 동시에 중국과 관계도 안정적으로 끌고 가야 한다. 핵심광물과 공급망, 수출 통제 같은 사안은 중국과 양자 채널을 상시 가동하면서, 혹시라도 충격이나 교란이 생기면 곧바로 정상화하고 안정하는 일이 모두 중요하다.”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현실이 되면서 원유 수급의 구조적 취약성이 다시 드러났다.

    “호르무즈해협이 조만간 정상화되기를 모두가 바라지만, 설령 정상화되더라도 많은 나라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수입선 다변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그간 중동에서 원유 70%가량을 들여왔는데, 이제는 비(非)중동으로 수입선을 구조적으로 넓히려 하고 있다. 다만 이런 일은 정부와 민간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민간은 수익 창출에 최적화하도록 설계된 만큼, 또 다른 충격에 대비한 안전장치는 정부가 마련하되 민간의 협조가 뒷받침돼야 한다.”

    국제회의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발언하려 하면 매우 큰 책임감이 느껴진다.


    정부가 ‘한국판 국별무역장벽(NTE) 보고서’를 만들겠다고 했다. 어떤 방향으로 설계·운용돼야 하나.

    “나는 한국 통상의 자연스러운 진화 단계로 본다. 우리 기업이 전 세계로 진출하면서 관세는 물론이고 비관세장벽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해외에 나간 자국 기업이 현지에서 차별이나 불합리한 대우를 당하면 USTR이 직접 나서서 아주 터프하게 대응한다. 우리도 진작 그래야 했다. 그래야 통상이 기업의 든든한 우군이 되고, 기업도 ‘통상이 우리를 받쳐주는구나’ 하고 성과를 체감하게 된다. 그렇게 성과 지향적으로 끌고 가려 한다.”

    글로벌화와 신자유주의가 퇴조하고 지정학과 경제 안보가 통상의 새 문법이 된 시대다. 이러한 ‘통상 뉴노멀’ 속에서 한국의 통상 전략은 무엇인가.

    “지난 3월 세계무역기구(WTO) 각료 회의에 갔을 때 글로벌 통상 환경이 정말 위기에 빠져 있다는 걸 절감했다. 그리고 이럴수록 한국의 모델과 경험, 리더십을 세계가 필요로 한다는 것도 함께 느꼈다. 우리나라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오히려 더 강해져 온 나라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기업 체질이 한층 강해졌고, 모방품을 만들던 단계에서 혁신을 주도하는 단계로 올라섰다. 

    그 과정에서 ‘FTA를 적극 활용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전환도 이뤄졌다. 위기가 오히려 발판이 된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나라가 뒷걸음치는 동안 우리는 체계적으로 위기를 넘기며 피해를 최소화했고, 그사이 어느새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다른 나라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충격을 최소화했다. 나는 위기에 강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이 DNA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 세계가 보호무역으로 퇴조하는 와중에 우리 수출은 역대 최대를 기록하고 있고, 우리 제조업 역량과 공급망이 오히려 더 각광받고 있다. 어렵지만, 한국은 늘 그래왔듯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치고 나가야 한다.”

    WTO를 중심으로 한 다자 무역 체제가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통상국으로서 한국의 역할은 무엇인가.

    “‘다자 체제와 WTO가 왜 필요한가’를 증명해 보이는 나라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한국이다. 세계 10대 경제권 가운데 1960~70년대만 해도 시장을 닫고 보호무역을 하다가, 산업화에 성공하며 시장을 열고, 지난 20여 년간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여기까지 올라온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지난 3월 카메룬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에선 WTO 개혁이 가장 큰 주제였다. 그 자리에서 우리나라는 WTO 개혁 세션의 조정자(Minister Facilitator)로서 영국·노르웨이·싱가포르, 코스타리카·뉴질랜드 5개국과 함께 개혁 논의를 주도했다. 

    3주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회의에선 우리가 부의장국을 맡아 산업 정책 논의를 이끌었다. 내가 사무관이던 시절엔 국제회의에 가면 눈치 보다가 ‘우리는 어디를 지지한다’며 거드는 역할에 그쳤다. 정책을 짤 때도 ‘미국·일본은 어떻게 하나’ 하고 해외 사례부터 뒤졌다. 그런데 지금은 참고할 해외 사례가 없다. 우리가 처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정책에서 본받을 나라가 없어,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국제회의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발언하려 하면 매우 큰 책임감이 느껴진다. 사람이 ‘나잇값’을 하듯, 우리도 나라의 위상과 격에 맞는 ‘나랏값’을 해야 한다.”

    통상 전문 인력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 왔다. 통상 전문가를 꿈꾸는 젊은 세대에게 한마디한다면.

    “이제 한국은 대세를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룰을 만들고 의제를 세팅하는 리더가 돼야 한다(젊은 세대에게 꼭 주고 싶은 메시지다). 영어 같은 언어 능력은 이제 기본이다. 외교 무대에서도 결국 콘텐츠가 있어야 통한다. 그 콘텐츠는 세계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다. 무역은 지정학과 외교·기업·문화·역사와 모두 얽혀 있다. 그리고 통상과 협상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이견을 좁히고 균형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나는 통상이 오케스트라 같다고 생각한다. 통상 지식에 더해 인간과 세계·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 또 그것이 지금의 지정학과 어떻게 맞물리는지까지 두루 갖춰야 비로소 국가를 대표하는 통상 협상가로 길러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