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국가 간 교역 확대가 군사적 충돌 위험을 실질적으로 낮춘다는 실증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보고서가 인용한 연구에 따르면, 양국 간 교역 규모가 두 배로 증가할 경우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은 약30%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역과 안보가 연결돼 있다는 가설은 정치경제학에서 가장 오래된 주장 중 하나지만, 이를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계량화한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라는 평가다. 보고서는 경제통합이 단순한 성장 효과를 넘어 안보 안정성에도 기여한다는 점이 입증된 만큼, 광범위한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과 경제 분절화(fragmentation)는 그동안 정책 계산서에 잡히지 않았던 막대한 안보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항공 기술이 만든 ‘자연 실험’
상업(무역)이 평화를 뒷받침한다는 가설의 역사는 수백 년에 이른다. 몽테스키외는 1748년 상업이 국민 간 상호 의존을 키워 풍속을 온화하게 한다고 봤고, 임마누엘 칸트는 1795년 전쟁과 양립할 수 없는 상업 정신이 결국 모든 국가에 스며들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무역과 전쟁의 인과관계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일은 오랫동안 난제로 남아 있었다. 전쟁이 무역을 위축시키기도 하고, 정치적 동맹 관계가 전쟁과 무역 모두에 영향을 미치며, 지리적 근접성이 이 모든 변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소개한 펑링 등 연구진의 논문은 이 인과관계의 매듭을 ‘자연 실험(natural experiment)’으로 풀어냈다. 1960년대 시작돼 1980년대 가속화한 장거리 제트기, 전용 화물기, 허브 앤드 스포크(Hub and Spoke)1) 물류 등 항공 기술 발전은 국가 간 운송 비용을 크게 낮췄는데, 그 효과가 모든 국가 쌍에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해상 항로가 직선 항공로에 비해 길고 우회적인 국가일수록 무역 증가 효과가 컸다. 예컨대 리투아니아에서 이라크까지 해상 운송은 발트해에서 수에즈운하를 거쳐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1만4000㎞ 여정이지만, 직항 항공로는 3000㎞ 미만이다. 항공 기술이 이 국가 쌍의 실효 운송 거리를 80% 가까이 줄인 셈이다. 반면 독일과 노르웨이처럼 이미 짧은 연안 항로로 연결된 국가는 항공 기술이 무역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고 바꿀 수도 없는 지리적 조건에 따라 동일한 기술이 전혀 다른 효과를 낳은 것이다.
적대 인식 자체를 누그러뜨리는 무역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항공 운송 비용 하락으로 양국 간 교역이 두 배로 늘어날 경우 군사적 충돌 발생 확률은 약 30% 감소했고,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그 강도가 약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분쟁의 경제적·인적 비용을 고려하면 경제통합이 가져다주는 이 배당 효과는 막대하다는 것이 보고서의 평가다. 무역의 평화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난 지역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였다. 글로벌 제조업 네트워크로의 빠른 통합이 역사적으로 불안정했던 이 지역의 안정화와 맞물렸다고 분석한다. 중국·한국·태국·미얀마·필리핀이 무역을 통한 분쟁 위험 감소 효과를 가장 크게 경험한 국가로 꼽혔다. 보고서는 전후 동아시아 안정화가 지난 70년간 가장 중대한 지정학적 현상 중 하나라며, 이번 연구가 그 핵심 동인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인과적 메커니즘을 제시한다고 평가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무역이 실제 분쟁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분쟁으로 가는 길을 닦는 적대 인식 자체를 완화한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각국 정부가 상대국을 경쟁적이고 위협적인 적으로 인식하는지를 측정한 전략적 경쟁 관계 데이터세트를 활용해, 양국 간 교역이 늘어날수록 전략적 경쟁 관계가 형성될 확률이 유의미하게 낮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군대가 움직이기 훨씬 전에 국가 행동을 좌우하는 적대감 인식 단계에서부터 무역이 긴장을 누그러뜨린다는 것이다.
상호 의존의 양면성…현실주의자의 반론
다만 보고서는 무역이 만들어내는 상호 이익이 강압적 지렛대로 무기화될 수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알베르트 허시만은 1945년 저서 ‘국력과 대외무역의 구조’에서 비대칭적 무역 의존이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강압할 수 있는 지렛대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최근 지경학 연구도 무역 관계가 제재, 수출 통제, 공급망 무기화를 통해 지정학적 영향력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해 왔다. 2026년 현재 이런 주장의 설득력을 부정하기 어렵다. 2022년 2월 이전 유럽의 러시아 가스 의존, 2023년 이후 중국의 희토류 수출 허가 통제 강화, 현재 글로벌 공급망을 뒤흔들고 있는 호르무즈해협 리스크가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광범위한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축소)이나 디커플링 어젠다가 같은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연구진에 따르면, 통합 자체를 축소해 의존도를 낮추려는 시도는 평균적으로 분쟁 가능성을 오히려 키우게 된다. 디커플링 계산서에 반영되지 않고 있는 안보 비용이 바로 이것이라는 지적이다.
두 개의 장부를 하나로 합쳐야
보고서는 워싱턴 정가가 서로 대조되지 않는 두 개의 장부를 따로 관리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쪽에서는 동맹의 가치와 방위비 분담을 논쟁하고, 다른 쪽에서는 무역의 후생 효과를 논쟁하지만, 안보 관계가 경제적 유대를 심화하고 경제적 유대가 안보 환경을 형성하는 교차 효과는 그 사이에서 실종된다는 것이다. 실제 CSIS의 선행 분석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 가입이 회원국 간 장기 양자 무역을 12~27% 늘린다는 점을 입증한 바 있다. 이런 효과가 계산에서 빠질수록 전후 질서가 만들어 온 수익은 비용처럼 보이고, 그 질서가 지속돼 온 이유는 폐기해야 할 이유처럼 보이게 된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용어설명
- 1허브 앤드 스포크(Hub and Spoke)
중심 거점(Hub)과 주변 연결망(Spoke) 구조로 자원·정보·교통·서비스를 운영하는 방식을 뜻한다. 바퀴의 중심축(hub)과 바큇살(spoke)에서 나온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