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주류 시장은 1999년 주류 유통량이 정점을 찍은 뒤, 지난 20여 년간 인구감소와 음주 문화 변화로 주류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전체 시장이 축소되는 가운데도 MZ 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를 필두로 ‘스마도리 문화’ 확산과 주세법 개정, 업사이클링(버려지는 제품을 새로운 제품으로 만드는 것) 주류 확대 등의 트렌드가 주목받고 있다. 스마도리란 스마트 드링킹(Smart Drinking)의 일본식 약어로, 개인의 음주 선택권을 존중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과 못 마시는 사람이 함께 어울리는 문화를 뜻한다.
스마도리, 소버 큐리어스…음주 권유 대신 ‘선택권’ 존중
스마도리 문화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의도적으로 술을 멀리하며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상태)’ 현상과 맞물려 무알코올 시장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산토리의 ‘무알코올 음료 리포트 2025’에 따르면, 일본 무알코올 시장은 2009년 통계 작성 이후 매년 성장해 2025년에는 전년 대비 3% 증가한 4730만 케이스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주목할 만한 트렌드는 음용 방식의 변화다. 최근 소비자 사이에선 술과 무알코올 음료를 번갈아 마시는 ‘제브라(Zebra) 음용’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위기와 맛은 즐기되 건강과 컨디션을 스마트하게 관리하려는 일본 소비자의 변화된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26년 4월 도쿄 시부야 오모테산도에 문을 연 ‘스마도리 미츠(SUMADORI Meets)’는 이런 트렌드를 반영한 체험형 매장으로, 0%, 0.5%, 3% 등 다양한 저알코올 라인업을 갖추고, 180여 가지 조합이 가능한 칵테일과 개인별 음주 스타일 진단 콘텐츠를 제공한다.
2026년 주세법 개정…‘맥주 전쟁’의 귀환
주세법 개정도 시장의 구조적 재편을 일으키는 동력으로 꼽힌다. 오는 10월 개정되는 주세법의 핵심은 계열별로 나뉘어 있던 복잡한 세율이 통합되는 것이다. 가령 맥주의 세금은 350㎖ 기준 63.35엔에서 개정 후 54.25엔으로 인하된다. 반면, 맥아 함량이 낮아 낮은 세율을 적용받았던 발포주나 신장르(제3의 맥주)는 세금이 인상돼 맥주와 세율이 같아진다. 이에 따라 산토리, 기린 등 대형 주류 기업은 발 빠르게 전략 일본의 성인 1인당 주류 소비량 추이 수정에 나섰다. 과거 세금을 피하고자 고안했던 발포주 라인업을 축소하는 대신, 프리미엄 맥주와 전통 라거 브랜드를 강화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신장르 주력 제품을 맥주 카테고리로 편입시키기 위해 맥아 함량을 높이고 있다.
양조장은 숙소로, 버려진 빵은 맥주로
최근 일본 주류 시장의 고객층은 내국인을 넘어 외국인 관광객으로 확대되고 있다.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개최와 엔저 현상, 일본 전통 누룩 기반 술 제조 기술의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 등재(2024년 12월) 등이 맞물리며 지방 양조장을 찾는 인바운드 관광객이 증가한 것이다. 나가노현 사쿠시에 있는 구라비토 스테이(Kurabito Stay)는 단순히 술을 사고 구경하는 것을 넘어, 양조장에서 숙박하며 직접 쌀을 씻고 누룩을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주목받는다. 환경과 가치 소비를 중시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트렌드도 주류 제조 공정에 스며들었다. 가나가와현 에비나시에서 1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사카에야 제빵은 인근 주조장인 이즈미바시 주조와 협업해 수제 맥주를 빚는다. 샌드위치를 만든 후 남은 식빵 테두리와 이즈미바시 주조의 정미 과정에서 부산물로 발생하는 쌀가루를 합쳐 맥아 사용량의 약 25%를 대체했다. 오사카의 ‘우메다 트윈타워즈 사우스’는 빌딩 내 입주 기업 직원용 식당과 바에서 배출되는 커피 추출 찌꺼기(커피박)를 수거해 맥주 원료로 재활용하고 있다. 이는 가격이나 브랜드뿐만 아니라 제조 과정의 진정성과 사회적 기여도까지 고려해 제품을 선택하는 까다로운 일본 소비자를 사로잡은 사례로 평가받는다.
한국 주류 시장에 주는 시사점
일본 주류 시장의 변화는 인구 감소와 MZ 세대의 부상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 시장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먼저 일본의 주세법 개정은 기업의 경쟁 동력을 세금 회피를 위한 제품 개발에서 품질 중심의 본질적 경쟁으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는 단순히 가격 경쟁력에 의존하던 저가 시장의 위축을 불러오는 동시에, 소비자가 오로지 맛과 품질에 집중해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K-푸드와 K-콘텐츠의 흥행에 발맞춰 전통주의 글로벌 수출 확대를 꾀하는 한국 역시 기업이 규제 대응보다 품질 고도화에 집중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또 스마도리 문화나 소버 큐리어스 현상은 주류 산업이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까지 포용해야 함을 보여준다. 아울러 지방 양조장을 고부가가치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인바운드 수요를 창출하고, 도심 속 부산물을 재활용해 업사이클링 주류를 생산하는 시도는 지역 재생과 ESG 경영의 결합 모델로서 가치가 높다. 지역 소멸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의 지방 도시 역시 이러한 문화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새로운 경제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