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전쟁에도 흔들리지 않은 달러의 힘…장기적 균열 누적은 한계
영국 국제 문제 싱크탱크 채텀하우스(Chatham House)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란 전쟁 이후에도 달러와 미국 국채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여전히 안전 자산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는 달러 패권 자체가 위기 시 자금이 몰렸던 전통적인 ‘절대적 강건한 가치’라기보다 미국 경제가 에너지와 군수 산업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충격을 덜 받는 구조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달러 체제가 단기적으로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미국 경제에 대한 글로벌 신뢰 약화와 지정학적 긴장 심화로 장기적으로는 구조적 균열이 누적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란 전쟁에도 강세 보인 달러와 미국 국채
보고서는 이란 전쟁 이후 국제금융시장에서 나타난 가장 특징적인 현상으로 달러와 미국 국채의 안정성을 꼽았다. 보고서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서 달러의 핵심적 역할은 위기 시 안전 자산 기능에 있다고 설명한다. 국제적 불안이 커질 때 투자자와 각국 정부는 유동성이 높고 거래가 쉬운 미국 달러 자산으로 자금을 이동하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유동성 공급 능력 역시 다른 국가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궁극적으로 미국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기반으로 유지돼 왔다. 중동 지정학 리스크가 확대됐음에도 투자자는 여전히 미국 국채를 대표적 안전 자산으로 인식했고, 달러 역시 글로벌 결제와 준비 통화 지위를 유지했다.
실제 보고서는 이란 전쟁 발발 이후 4월 7일(현지시각) 1차 휴전까지 달러 가치와 미국 금융시장이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달러는 주요 통화 바스켓 대비 약 2% 상승했고, 미국 S&P 주가지수 하락 폭도 다른 국가 대비 상대적으로 작았다.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약 35bp 상승해 4.3%수준까지 올랐지만, 독일 국채 금리 상승 폭(45bp)보다는 작았다. 이는 과거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2003년 이라크 전쟁, 2001년 9·11 테러 당시와 비교해도 미국 시장이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유지한 것으로 평가됐다. 특히 달러 환율 움직임은 1991년 걸프전 당시와 유사한 수준의 강세를 보였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달러 약세와는 다른 흐름을 나타냈다. 미국 증시 역시 과거 위기 사례와 유사하게 상대적 강세를 유지했다. 보고서는 이를 통해 달러의 글로벌 안전 자산 지위가 단기적으로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는 과거 금융 위기나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당시와 유사한 흐름이다. 글로벌 불확실성이 확대할수록 국제 자금은 미국 국채와 달러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였다. 보고서는 이러한 흐름이 달러 패권 지속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제금융 시스템이 여전히 미국 중심 구조 위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미국 경제의 구조적 안전성이 핵심
다만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달러 시스템의 압도적 우위’로만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시장 반응은 달러 자체의 힘보다 미국 경제가 전쟁 충격에 상대적으로 덜 노출된 구조와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미국이 석유와 가스 분야에서 사실상 에너지 자급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셰일 혁명1) 이후 미국은 주요 에너지 생산국으로 전환했으며, 중동발 공급 충격에 대한 의존도가 과거보다 크게 낮아졌다. 여기에 군사 산업 역시 미국 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될수록 미국 방산과 관련 공급망은 오히려 수혜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미국 경제는 상대적으로 방어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로 돼 있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금융시장에서 나타난 미국 자산 선호 역시 이러한 상대적 안전성이 반영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즉 투자자가 달러를 선택한 이유는 달러 패권에 대한 절대적 신뢰라기보다 글로벌 불안 속에서 미국 경제가 가장 덜 위험한 선택지로 인식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흔들리는 글로벌 신뢰와 달러 체제의 균열
보고서는 동시에 미국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전쟁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약화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미국의 재정 적자 확대와 정치적 분열, 제재와 금융 시스템을 활용한 압박 강화 등이 누적되면서 일부 국가는 달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에너지와 자원을 둘러싼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하면서 중국과 중동 국가를 중심으로 비달러 결제 확대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보고서는 이번 전쟁 국면에서 중국 금융시장이 보여준 안정성에 주목했다. 중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1.8% 수준에서 거의 변동이 없었고, 중국 증시는 일부 약세를 보였지만 위안화 가치는 오히려 상승했다. 특히 중국은 주요 에너지 수입국 가운데 전쟁 이후 통화 가치가 상승한 거의 유일한 국가로 평가됐다. 보고서는 중국 경제가 전쟁 충격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은 구조적 이유도 제시했다.
중국은 대규모 에너지 수입국이지만 전력 생산에서 석유·가스 의존도가 낮고, 석탄·태양광·풍력·원자력·수력발전 비중이 높다. 또한 이란산 원유 공급도 큰 차질 없이 유지됐으며, 중국은 약 14억 배럴 규모의 원유를 비축하고 있어 약 3개월 소비량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인플레이션 측면에서도 중국은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다. 세계 각국이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을 우려한 반면, 중국은 오히려 낮은 물가 상승률이 문제였기 때문에 에너지 가격 상승 충격을 흡수할 여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달러를 대체할 만한 통화 체제가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달러 중심 국제 질서에 대한 의문이 커질 수 있다고 분석한다. 채텀하우스는 현재 달러 체제를 ‘불안정한 유지 상태’로 표현했다. 단기적으로는 달러 지위가 유지되고 있지만, 지정학적 긴장과 글로벌 신뢰 약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구조적 균열이 축적되고 있다는 의미다.
용어설명
- 1셰일 혁명
지하 깊숙한 곳의 단단한 암반층 사이에 있는 셰일가스와 셰일오일을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뽑아낼 수 있는 수압 파쇄법 등이 2010년대 상용화된 것을 일컫는다. 셰일가스 혁명 덕에 미국은 2018년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으로 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