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인구 5000만 명, 국내총생산(GDP) 1조7000억달러 규모의 유럽연합(EU) 4위 경제 대국이다. 스페인과 한국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양 끝에서 대륙과 해양을 잇는 교량 국가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은 디지털 경제의 핵심인 반도체와 정보통신기술(ICT)에서 높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고, 스페인은 신재생에너지 비율이 50%에 달하는 친환경 에너지 선도국이다. 얼마 전 서울 용산구에 있는 관저에서 훌리오 에라이스 에스파냐(Julio Herraiz Espana) 주한 스페인 대사를 만났다. 에스파냐 대사는 한·스페인 경제협력에 대해 “혁신 및 기술 주도형 분야를 중심으로 상당 부분 개척되지 않은 잠재력이 큰 협력 분야가 여전히 있다”면서 친환경·저탄소 기술과 인프라·방위산업 분야 등을 유망 분야로 제시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과 경제협력에서 스페인이 기대하는 건 뭘까.
“스페인과 한국 간 양자 경제·무역 협력을 견인하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스페인 경제가 유럽 주요 국가 중에서 두드러지게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최근 몇 년 동안 이룩한 생산 기반 현대화도 주목할 만하다. 스페인 경제는 지난 2년간 평균 성장률 유로존 평균의 두 배를 넘겼다. 올해도 견조한 경제성장을 이어갈 전망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스페인의 2026년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2.3%로 상향 조정했다. 선진국 평균(1.8%)을 상회하며, 유로존 평균(1.3%)보다 1%포인트 높다. 또한 양국 간 투자 환경은 상호 보완적인 강점과 유럽과 중남미를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진출을 돕는 관문으로서 스페인의 전략적 입지에 힘입어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스페인 내 배터리 공장 투자 등이 이 같은 상황을 잘 보여준다.”
현대모비스는 스페인 나바라주(州) 전기차 배터리 시스템 공장 양산을 앞두고 있다. 축구장 21개 크기 부지에 들어선 이 공장은 연간 최대 36만 대 규모의 배터리 시스템(BSA)을 생산할 수 있다. BSA는 전기차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배터리팩에 제어장치 등 전장 부품을 결합한 완제품이다. 해당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인근 폭스바겐 공장 등에 공급될 예정이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스페인 카탈루냐에 연산 3만t 규모 스마트팩토리 동박 공장을 건설 중이다.
스페인은 경제협력 파트너로서 한국을 어떻게 보나.
“가치관을 공유하는 경제 파트너로 생각한다. 양국은 다자주의와 규칙에 기반한 국제무역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공유하고 있다. 또한 양국 모두 경제 발전과 혁신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스페인 기업도 점점 더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지금 같은 지정학적 상황에도 양국 간 협력을 심화할 분명한 기회가 있다. 따라서 양국 기업의 상호 시장 접근성을 개선하고, 상호 투자 환경과 정책을 더 개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협력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분야의 협력이 유망할까.
“특히 혁신 및 기술 주도형 분야를 중심으로 상당 부분 개척되지 않은 잠재력이 큰 협력 분야가 여전히 있다. 유망한 분야 중 하나는 친환경·저탄소 기술이다. 스페인은 에너지전환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으며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탄탄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2018~2025년 11월 기준 스페인은 미국에 이어 신규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와 청정 수소 프로젝트 유치 규모에서 각각 2위를 기록했다. 한국 기업의 첨단 기술과 스페인 기업의 경험·노하우가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전환 분야는 어떤가.
“스페인의 경쟁력을 위해 최우선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다. 한국 기업은 디지털 솔루션 및 첨단 제조 분야 선두 주자다. 2018~2025년 11월, 스페인은 AI 관련 활동 및 그린필드 통신 프로젝트 유치 규모에서 세계 5위, 연구개발 활동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스페인은 또한 역동적인 스타트업 생태계를 자랑한다. EU 역내에서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르다. 푸드테크와 생명공학 등 딥테크 분야에서 다수의 스타트업이 활동하면서 한국과 협력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또 어떤 분야의 협력이 유망할까.
“인프라는 또 다른 핵심 분야다. 스페인은 교통·인프라 개발 분야 선도국이다. 스페인과 한국 기업은 이미 제삼국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며, 앞으로 협력 관계를 더 확대할 수 있다. 양국 모두 산업 경쟁력이 큰 방위산업 분야 협력도 유망하다. 농식품 분야에서는 지난 10년간 양국 간 교역이 많이 증가했으나, 품질과 다양성으로 잘 알려진 스페인 제품을 더욱 적극적으로 홍보할 여지는 충분하다. 관광 분야도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국 관광객의 스페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스페인은 ‘2025년 한국인 해외여행 만족도 조사’에서 1위에 선정됐다.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은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로 손꼽힌다.”
투자 매력을 높이기 위한 스페인 정부의 노력 소개 부탁한다.
“스페인은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비즈니스 및 법적 환경을 제공한다. 불확실성이 커진 지금 같은 투자 여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일례로 스페인 정부는 생산 모델 현대화에 기여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지분 또는 ‘유사 지분’1) 투자를 통해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공동투자기금(FOCO)을 설립했다. 에너지 효율, 탈탄소화, 전기 이동성, 디지털화, 재생 에너지, 지속 가능한 인프라, 생명공학 및 지속 가능한 농업 등이 관련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지난 1월에는 ‘스페인 성장 펀드(Spain Grows Fund)’라는 새로운 기금을 설립했다. 105억 유로의 초기 자본금을 바탕으로, 국내외 투자자로부터 최대 1200억유로 민간 자금 유치를 목표로 한다. 대출, 보증 또는 지분 투자를 통해 민간 부문과 공동 투자 예정이며, 주택, 에너지, 디지털 전환, AI, 순환 경제, 인프라, 보안 등 스페인 경제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핵심 분야를 우선 지원할 예정이다.”
스페인을 기반으로 다른 유럽 국가에 진출하는 건 좋은 전략일까.
“스페인은 유럽 시장으로 진출을 모색하는 한국 기업에 훌륭한 전략적 거점이 될 수 있다. EU 단일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접근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비즈니스 환경, 탄탄한 인프라, 경쟁력 있는 운영 비용, 고도로 숙련된 인력, 주요 산업 분야의 강력한 생태계 등 다양한 장점을 갖추고 있다. 또한 스페인은 다른 주요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한 이상적인 관문이다. 지리적 위치 덕분에 북아프리카 시장으로 접근이 용이하며, 중남미와 긴밀한 문화·경제적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자연스러운 진입 통로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역할은 최근 체결된 EU와 메르코수르(MERCOSUR·남아메리카 공동 시장) 간 무역협정으로 더욱 강화됐다. EU 역내 최대 규모의 고속도로망, 두 곳의 세계적인 공항,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고속철도망 그리고 여러 주요 컨테이너 항구를 포함한 탄탄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는 것과 낮은 에너지 비용 또한 매력 요인이다.”
EU는 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우루과이·볼리비아가 참여하는 남미 경제 공동체인 메르코수르와 25년에 걸친 협상 끝에 지난 1월 자유무역협정(FTA)에 서명했다. EU·메르코수르 FTA는 5월 1일(현지시각) ‘잠정 시행(Provisional Application)’됐다. 이에 따라 메르코수르는 EU 수입품 91%에 대해 최장 15년에 걸쳐 관세를 철폐해야 한다. 자동차(35%), 자동차 부품(14~18%), 기계류(14~20%), 화학제품(최고 18%), 의약품(최고 14%) 등 높은 관세가 적용되던 품목이 주요 수혜 대상이다.
또 EU 기업이 메르코수르 회원국 정부 입찰에 현지 기업과 동등한 조건으로 참여할 길이 열린다. 반면 메르코수르 회원국은 EU에 소고기와 닭고기, 산업용 에탄올 등을 ‘저율 관세할당(TRQ)’2) 방식으로 수출할 수 있다. 소고기는 연간 9만9000t에 대해 7.5%의 낮은 관세를 적용하며, 가금류(닭고기 등)는 연간 18만t까지 무관세다. 에탄올(65만t), 설탕, 쌀 등 주요 농산물에 대해서는 쿼터가 신설 또는 확대된다.
스페인의 지리적 위치 덕분에 북아프리카 시장으로 접근이
용이하며, 중남미와 긴밀한 문화·경제적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자연스러운 진입 통로 역할을 한다.
스페인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과 투자자에게 조언 부탁한다.
“스페인 시장에 처음 진출할 때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예측 가능한 부분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건 스페인 전문가의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사고방식이 실용적이고 해결책 중심적이어서 복잡한 상황에도 잘 적응한다. 기술적 역량과 문제 해결 능력을 결합하는 것은 스페인 전문가의 확실한 강점이다.
한국 기업과 투자자는 그런 부분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예측 가능한 부분은 주로 규제 및 문화와 관련이 있다. 스페인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은 지역 당국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스페인 규제 체계와 행정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문화 또한 중요한 요소다. 스페인의 기업 문화는 수평적이며, 의사소통이 직접적인 편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신뢰는 비즈니스 수행의 핵심 요소인데,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용어설명
- 1유사 지분
유사 지분은 부채와 지분 성격이 모두 있는 금융 상품을 총칭한다. ‘하이브리드 증권’ 또는 ‘자본성 증권’으로도 부르며, 부채와 지분 장점을 결합해 자본을 조달하려는 목적으로 발행한다.
- 2저율관세할당(TRQ)
정해진 물량까지는 낮은 관세를 적용하고 이를 초과하는 물량부터는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이중 관세 제도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