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FTA 역사로 보는 통상 관세 이야기 10% 관세가 국제무역 표준 된 배경은
  • 김용태 법학박사 법무법인 린 관세통상팀장
  • 6세기 후반~7세기 잉글랜드 남·동부 해안과 북유럽·스칸디나비아 연안에는 오늘날 윅스 또는 엠포리움이라 불리는 대규모 교역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윅스는 왕국의 경계에 있는 대규모 국제 교역의 시장이자 거점이었고, 대체로 왕이나 지배자의 영향력 또는 통제 아래에 있었다. 중세 통치자의 주요 관심사는 상인 활동 통제, 항구 통행세 징수, 법과 질서 유지, 수입 상품에 대한 우선 접근권 확보에 있었다. 중세 초기 유럽과 비잔틴제국의 통행세와 무역관리 시스템은 로마제국의 관세·통행세 제도의 큰 영향을 받았다. 로마의 관세는 제국 재정에 속하는 국세로 특정 관세 구역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허가료 성격의 세금이었다.

    후기 로마의 국경무역관리와 상업 백작

    관세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상품 판매에 부과하는 거래세와 운송 상품에 부과하는 통과세다. 세금은 현금 또는 현물로 납부되었으며, 고정 금액과 종가세가 혼합된 형태였다. 관세 징수는 로마의 영토(지방 및 기타 행정 경계와 일치하는, 정의된 지리적 지역)에 기반한 관세 구역에서 이루어졌다. 각 구역에는 중심 도시가 있었고, 그 주변에 여러 관세소가 설치됐다. 군대와 행정조직이 협력하여 상인에게 관세를 징수했으며, 국경 지역은 특히 높은 세율이 적용됐다. 후기 로마제국 시대에는 외적 위협의 증대에 대응해 외국 상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는 국경무역을 특정 도시로 집중시켜 관세 징수와 외국인 감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4세기 말에는 상업 백작이 국경 지역에서 관세 징수와 외국 상인과 상업 관계를 총괄했으며, 사치품(비단 등) 수입을 통제하고, 무기·곡물·금속·염분·와인·올리브유 등 전략물자 수출을 금지했다. 외국 상인은 허가 없이 교역 도시를 떠날 수 없었고, 몰래 숙박을 제공한 사람은 추방이나 재산 몰수 처벌을 받았다.

    비잔틴제국의 아포테케와 국가적 통제 모델의 확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시대 상업 관료가 외국 상인의 관리와 관세 징수를 담당했다. 이들은 아포테케라 불리는 세관 창고 시설을 관리했다. 해당 시설은 외국 상인의 숙박 시설, 상품 보관 창고, 무역 거래 장소, 관세 징수 장소로 기능했다. 상품 묶음에는 관리 이름이나 지역이 적힌 봉인이 붙었는데, 이는 관세 절차가 완료되었음을 증명하는 표시였다. 이 같은 상업 숙소 제도는 비잔틴제국뿐 아니라 중세 이슬람 세계의 펀두크 등으로 광범위하게 확산했으며, 외국 상인의 이동·거래·보관을 통제하고 과세하기 위한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국가 수단으로 기능했다. 이는 후기 로마에서 중세 초기까지 관세 제도와 결합한 외국 상인 관리의 전형적 모델이었다. 프랑크인은 비잔틴제국과 직접적 교류, 또 이탈리아의 롬바르드왕국을 매개로 한 간접적 전파를 통해 로마·비잔틴제국의 국경 통제, 무역 허가, 관세 제도를 수용했다. 롬바르드 왕 아이스툴프는 알프스 통로의 국경 통행세와 출입 통제를 강화했는데, 이는 이후 프랑크왕국 지배로 계승되었다. 프랑크왕국에서 샤를마뉴는 동부 국경에서 무기와 사슬 갑옷의 판매 및 밀수를 금지하고, 무역은 특정 도시의 합법 시장에서만 허용했다. 이를 위반하면 처벌로 상품을 몰수했다. 이러한 합법 시장은 왕권의 허가·묵인 아래 정해진 장소·시기에 운영되었고, 통행세는 왕실 관리가 징수했다.

    10% 관세의 유사성은 각 국가가 비슷한 규정을 채택함으로써
    상인은 국제무역에서 일정한 규칙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항구의 관세 행정과 10% 종가세

    프랑크왕국의 항구는 중요한 관세 징수 지점이었다. 프랑크왕국령 이탈리아는 공인된 항구 밖 무역을 금지했다. 해안과 강 유역은 각각 독립된 관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단일 관세 구역인 도레스타트-위트레흐트, 잉글랜드와 무역 중심지인 켄토비크에서 왕실의 통행료 징수관이 활동했다. 수도원장 게르볼드는 왕국의 무역 감독관으로서 여러 항구와 도시에서 관세와 세금을 징수했다.

    프랑크왕국의 국경 관세 중 중요한 것은 10% 종가세의 데시마라는 세금이었다. 828년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의 칙령은 왕의 상인과 관리에게 관세를 면제하되, 알프스 통로, 켄토비크, 도레스타트 국경 관세소에서는 왕실의 데시마 징수를 명시했다. 이에 따라 알프스를 넘어 롬바르디아로 들어오는 상인에게 말·노예·직물·주석·검 등에 10%를 과세했다. 일부에서는 데시마가 세율(10%)이 아니라 왕실 세입의 10분의 1 배분을 뜻하기도 한다. 또 프리지아(네덜란드와 독일 서북부)·노르망디(프랑스 북서부)·오토(독일) 지역에서는 교회·수도원에 관세 수입의 10분의 1(십일조·교구세)을 분여하는 관행도 있었다. 7세기 이후 이슬람 국가에서도 외국 상인에게 우슈르라는 10%세금을 부과했고, 8세기에는 무슬림 스페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0% 관세 보편화와 상호주의

    종합하면 9세기 초까지 유럽 주요 국가의 국경에서 외국 상인에 대한 10% 관세를 부과했다. 비잔틴제국에서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 개혁과 함께 12.5%의 옥타바에서 10%의 데케테이아로 바뀌었고, 이 같은 모델은 서유럽에 영향을 주었다. 메로빙거 시대부터 생산·거래에 대한 10% 과세의 전통과 지중해 교역의 관문인 마르세유의 행정 경험이 프랑크왕국 항만(켄토비크·루앙·도레스타트 등)의 관세 운영에 깊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10% 관세의 유사성은 지중해 세계와 유럽 전역에서 상호주의적 무역 규칙이 확산했음을 보여준다. 각 국가가 비슷한 규정을 채택함으로써 상인은 국제무역에서 일정한 규칙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