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MC-14)가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카메룬 야운데에서 개최된 가운데, 글로벌 통상 질서가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산업통상부는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을 수석대표로 하는 정부대표단을 파견하여, WTO 개혁, 전자적 전송 모라토리엄,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협정(IFDA)의 WTO 법체계 편입 등 핵심 의제 논의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 우리나라는 단순한 참여를 넘어, 주요 회원국간 입장 차를 조율하고 논의의 방향을 설정하는 등 논의 전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존재감을 강화하였다.
이번 회의는 단순한 협상 결과를 넘어, 다자무역체제가 ‘유지’가 아닌 ‘재설계 국면’에 진입했음을 보여준 자리였다. 주요 의제마다 회원국간 입장 차가 극명하게 드러났고, 전자적 전송 및 무역에 관한 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 비위반· 상황 모라토리엄 연장은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국은 주요 협상 그룹과 조정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중견 통상 국가로서의 존재감과 리더십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WTO 개혁 논의 주도…“합의는 미완, 방향은 확보”
이번 MC-14는 ‘개혁 각료회의’라는 이름에 걸맞게 WTO 개혁 이슈가 핵심 의제로 다루어졌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우리나라 수석대표로는 최초로 금번 각료회의의 주요 공식 세션인 개혁 세션 조정자(Minister Facilitator)로 선임되어, 근본 이슈, 의사결정, 개발(S&DT), 공정경쟁 환경 등 4개 세션 논의를 주도했다. 아울러 향후 WTO 개혁 논의를 위한 장관급 지침 마련 협의가 진행됐으나, 미국·인도·EU 등 주요국 간 입장 차가 끝내 좁혀지지 않으면서 ‘그린룸’ 협상이 수차례 가동되는 등 협상은 막판까지 난항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여 본부장은 핵심 쟁점에 대한 주요국 간 절충안을 모색하며 협상의 흐름을 조율하는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WTO 개혁 작업계획에 대한 주요국 간 합의가 도출되었으나 동 이슈가 전자상거래 모라토리엄 연장 등이 패키지로 연계되면서 최종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비록 최종 합의 도출에는 실패했지만, WTO 개혁의 주요 쟁점과 향후 논의 방향에 대한 회원국 간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이번 회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IFDA 편입 난항 속 한국 주도로 ‘이행 전환’ 돌파구 마련”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협정(IFDA)은 WTO 129개 회원국이 참여한 복수국간 협정으로, 우리나라와 칠레가 공동의장국으로 협상을 주도하여 2024년 타결되었다. 우리나라는 IFDA의 WTO 법체계 편입을 위해 3월 25일 IFDA 장관급 부대행사를 개최하고, 참여국 및 국제기구와 함께 협정의 정책적 효과와 개발 기여 가능성, 이행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여한구 본부장은 개회사를 통해 한국전쟁 이후 취약한 산업 기반 속에서도 투자환경 개선을 통해 경제 도약을 이룬 경험을 소개하며, 투자환경의 예측 가능성과 투명성이 성장의 출발점임을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그간 IFDA의 WTO 편입을 반대해온 인도와 튀르키예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설득을 이어왔고, 그 결과 튀르키예가 반대 입장을 철회하고 방글라데시가 신규 참여하는 등 협정의 외연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반대가 지속되면서 최종적인 WTO 편입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협상이 교착 상태에 머무르지 않도록 논의의 방향을 전환하는 데 주력하여 논의의 중심을 ‘법적 편입’에서 ‘조속한 발효와 이행’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여 본부장은 회의 마지막 날 IFDA 참여국 긴급 전략회의를 소집해 WTO 편입이 지연되더라도 협정의 실질적 효과를 조기에 창출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이를 통해 IFDA가 단순한 합의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투자환경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모라토리엄 좌초…전자상거래 협정은 ‘이행’으로 전환”
전자적 전송 무관세 관행(모라토리엄) 연장 실패는 이번 회의의 가장 뼈아픈 결과 중 하나였다. 미국·한국·일본·싱가포르 등은 영구적 무관세 유지를, 브라질·인도 등은 2년 연장을 주장하며 입장 차가 지속됐고, 5년 절충안까지 제시됐으나 브라질이 끝까지 2년 연장을 고수하면서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다만 이러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66개국이 WTO 전자상거래 협정의 임시이행을 선언하면서, 그간 합의에 머물러 있던 규범이 실제 적용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전자상거래 협정에는 전자적 전송 무관세, 전자서명·디지털 인증, 소비자 보호 등 핵심 규범이 포함되어 있어, 국경 간 전자상거래 절차 간소화와 거래 비용 절감 등 실질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이는 우리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입 여건을 개선하고 K-컨텐츠 수출 확대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모라토리엄 연장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전자상거래 협정의 이행 기반이 마련되면서 디지털 통상 규범은 논의 단계에서 실행 단계로 한 걸음 나아간 것으로 평가된다.
+ PLUS POINT
새벽 1시 32분, ‘그린룸’…마라톤 협상의 마지막 순간
3월 29일 새벽 1시 32분. 며칠간 이어진 협상으로 모두가 지쳐 있을 시간이었지만, WTO 각료회의장 한편에 마련된 ‘그린룸(Green Room)’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린룸은 미국, EU, 인도, 중국, 브라질 등 주요국 장관 등 핵심 협상 참여자들만 들어와 최종 쟁점을 조율하는 WTO 특유의 고위급 협상 공간이다. 1970~80년대 GATT 시절부터 이어져 온 관행으로, 다자무역체제의 주요 합의가 도출되는 ‘마지막 협상 테이블’로 불린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은 WTO 개혁 세션 조정자로 참여하면서, 과거와 달리 그린룸의 중심 테이블에 자리했다. 이는 단순한 참석을 넘어, 글로벌 통상 규칙 형성 과정에 직접 관여하는 국가로 위상이 격상됐음을 의미한다.
당시 회의장에서는 한 문장, 한 표현을 둘러싸고 국가 간 입장이 첨예하게 맞섰다. 협상은 진전을 보이다가도 다시 되돌아가기를 반복했고, 합의가 무산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이어졌다. 그러나 조정자들과 주요국 간 끈질긴 설득과 조율 끝에, 반대 입장이 하나씩 정리되며 결국 마지막 문안이 도출됐다. 잠시 흐른 침묵 뒤, 참석자들 사이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번 그린룸 협상은 다자무역체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상황에서도,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무역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그 한복판에서 협상의 흐름을 잇는 역할을 수행하며, 다자통상 질서 속에서의 위상과 역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