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포럼(WEF·World Economic Forum)이 발간한 글로벌 위험 리포트(Global Risks Report 2026)는 올해를 ‘경쟁의 시대(Age of Competition)’로 규정하고, 2026년 세계는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진단한다. 보고서는 전쟁의 확산, 경제 수단의 전략적 무기화, 사회 분절의 심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안정성을 떠받쳐 온 국제 규칙과 제도가 점차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고 있다고 봤다. 리스크는 더 이상 개별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규모·속도·상호 연결성이 동시에 증폭되면서 시스템 전반에 연쇄적 충격을 가하는 구조로 변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전 세계 전문가 절반 “향후 2년간 세계 전망 격동 일 것”
WEF가 2025년 8월부터 9월까지 전 세계 학계·정부·기업·국제기구·시민사회 전문가 13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글로벌 리스크 인식 조사(GRPS)에 따르면, 향후 2년간 세계 전망을 ‘격동(turbulent)’ 또는 ‘폭풍(stormy)’으로 본 응답이 50%에 달했다. 10년 후에는 이 비율이 57%까지 상승한다. ‘안정적이다(stable)’ 혹은 ‘차분하다(calm)’고 본 응답은 각각 1%에 불과했다. 세계 지도층의 인식 속에서 세계의 미래는 점점 더 불안정한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설문 조사였다.
이러한 비관적 전망의 중심에는 ‘지경학적 대립(Geoeconomic confrontation)’이 있다. 보고서는 향후 2년간 가장 심각한 글로벌 리스크로 이를 지목한다. 지경학적 대립은 단순한 무역 갈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재, 투자 통제, 보조금, 공급망 통제, 기술이전 제한, 금융·통화 수단까지 동원해 국가가 경제를 지경학1)적 전략의 도구로 활용하는 현상을 뜻한다. 실제로 ‘지경학적 대립’은 2025년 WEF 조사에서도 단기적인 최상위 리스크로 부상했다.
글로벌 리스크 전망
‘다자주의 없는 다극화’의 등장
보고서는 지경학적 대립 현상이 다자주의2)의 약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설명한다. 규칙 기반 국제 질서가 약화하면서 각국은 다자 틀 대신 자국 중심 전략을 택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글로벌 협력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보고서는 이를 ‘다자주의 없는 다극화(multipolarity without multilateralism)’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힘의 중심이 여러곳으로 분산되었지만, 이를 조정할 제도적 틀이 약화한 상태라는 의미다. 이로 인해 경제·외교·군사 영역에서 충돌 가능성이 커지고, 공동 대응이 필요한 기후, 보건, 공급망, 기술 규범 문제는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환경 리스크의 ‘후순위화’다. 단기 2년 전망에서 극한 기후, 오염, 생태계 붕괴 등 환경 리스크는 순위가 하락하고 심각도 점수도 낮아졌다. 단기적으로는 지경학적 충돌과 경제·사회적 불안이 더 시급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10년 장기 전망에서는 상황이 정반대다. 극한 기후와 생태계 붕괴는 여전히 가장 심각한 리스크로 평가된다. 단기적 위기가 장기적 위협을 가리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 리스크 또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경기 침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자산 거품 붕괴 위험 요인은 지난해 대비 큰 순위 상승을 기록했다. 보고서는 고부채 환경과 변동성 확대, 지경학적 긴장 고조가 맞물리면서 향후 2년간 글로벌 경제가 새로운 불안정 국면에 진입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술 리스크도 단기와 장기에서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단기적으로는 허위 정보와 사이버 보안이 핵심 우려로 떠올랐으며, 장기적으로는 인공지능(AI)의 부정적 결과가 가장 빠르게 순위가 상승한 리스크로 나타났다. 기술 가속화가 기회와 위협을 동시에 증폭시키는 구조가 명확히 드러난다.
이러한 리스크의 근본 원인을 ‘구조적 변화(structural forces)’에서 찾는다. 기술 가속화, 지정학적 재편, 기후변화, 인구구조 양극화라는 네 가지 구조적 요인이 서로 얽히며 리스크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정학적 재편과 기술 가속화는 경제 수단의 무기화와 직결되며, 이는 다시 사회 분열과 불평등 심화를 통해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진다.
또한 보고서는 향후 10년간 가장 상호 연결성이 높은 리스크로 ‘불평등(inequality)’을 지목했다. 불평등은 단순한 소득 격차가 아니라, 시민과 정부 사이의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을 약화하는 요인이며, 이는 다른 글로벌 리스크를 촉발하는 연결 고리로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정부에 대한 신뢰 약화는 사회 분열을 심화시키고, 이는 다시 정책 마비와 리스크 대응 실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울러 단기적 리스크뿐만 아니라 장기적 리스크 요인 중 하나로 ‘AI의 영향’을 재차 강조했다. AI가 단순히 기술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노동시장 구조를 변화시키고, 정보 생태계를 재편하며, 국가 안보 영역까지 확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AI의 발전은 인간이 수행해 오던 고급 인지 작업까지 대체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고용구조와 사회 불평등, 정치적 안정성에까지 파급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동시에 AI는 군사적 활용 가능성, 자동화된 의사 결정, 정보 통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어, 사회 통제와 안보 질서에 새로운 변수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리스크의 연결성은 커지고 확산 속도는 빨라
WEF 보고서가 강조하는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세계는 협력이 줄어드는 가운데 경쟁이 강화되는 국면으로 진입했으며, 이러한 환경에서는 리스크의 연결성과 확산 속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국가 간 대립과 경제 불안, 사회 분열이 전면에 드러나고, 장기적으로는 기후와 기술 리스크가 더 심화하는 이중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보고서는 미래가 고정된 경로가 아니라 오늘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여러 가능성의 집합이라고 강조한다.
용어설명
- 1 지경학
‘지정학(geopolitics)’과 ‘경제학(economics)’을 합친 말로, 국가가 외교 및 안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제적 수단(무역· 금융 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학문이다. 지경학은 경제정책을 안보를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으로,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미·중 간 패권 경쟁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지경학에서는 무역 규제, 금융 제재, 기술 통제, 투자 제한, 자원 무기화 등이 핵심 수단으로 이용되며, 이를 통해 세계의 경제적 주도권과 공급망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2다자주의
여러 나라가 무역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세계 수준의 협의체를 두고 가치 체계나 규범, 절차 따위를 각국이 준수하고 조율하도록 한다는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