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카메룬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제14차 각료회의(MC14)가 개최될 예정이다. MC14를 앞두고 열린 일반 이사회에서는 구체적 성과 도출이 요구되는 분야로 전자상거래(이커머스)가 지목됐다. 특히 ‘전자적 전송(electronic transmissions)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유예)’1)의 향방이 최대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1998년 WTO 회원국은 전자상거래 작업 프로그램에 합의했다. 이후 각료회의 때마다 모라토리엄을 반복적으로 갱신해 왔다. 현재 회원국은 전자상거래 작업 프로그램의 실질적 활성화, 개발 차원의 고려 강화, 인공지능(AI)을 포함한 신흥 디지털 무역 이슈 반영 등의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를 압도하는 핵심 쟁점은 단연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 존속여부다.
일부 회원국은 모라토리엄을 연장해 온 관행을 유지하되, 비용과 편익에 대한 추가 분석을 지속하자는 입장이다. 또 미국 중심의 일부 국가는 디지털 무역에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위해 모라토리엄을 영구화하거나 최소한 장기 연장하는 방안을 주장한다. 반면 인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관세 수입 감소와 정책적 재량 축소를 이유로 모라토리엄 연장에 강하게 반대한다. 다만 MC13에서 모라토리엄에 가장 강경하게 반대했던 인도네시아가 미국과 양자 협정을 통해 영구 모라토리엄에 합의한 전례를 보면, 이번 MC14에서 논의가 다자적 원칙보다 주요국 간 양자 관계에 크게 좌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 문제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2025년을 전후해 체결된 다수의 양자 무역협정을 통해 WTO 차원의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 영구화에 대한 지지를 체계적으로 확보해 왔다. 태국·말레이시아와 무역협정 팩트시트에 있는 ‘디지털 무역, 서비스 및 투자를 위한 장벽 제거’ 항목에는 ‘WTO 차원의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의 영구적 모라토리엄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과테말라·에콰도르·엘살바도르와 미국의 무역협정 팩트시트에도 동일 내용이 포함돼 있다. 캄보디아와 무역협정 제3·4조, 인도네시아와 무역협정 팩트시트는 WTO 차원의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의 영구적 모라토리엄 지지를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이행하도록 규정했다. 반면 베트남·아르헨티나와 미국의 무역협정은 전자적 전송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그치고 있어, 미국의 전략은 국가별 상황에 따라 설계되고 있다. 한·미 간 합의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한국은 미국과 네트워크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 등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률과 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받지 않도록 하고, 국경 간 데이터 이전을 원활히 하기로 합의했다. 나아가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 영구화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또 미국은 유럽연합(EU)과 무역협정 제17조에서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 부과 금지’와 더불어 WTO 차원의 무관세 모라토리엄을 영구 다자적 약속으로 채택하는 방향을 추구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양자 협정을 통해 확보한 광범위한 지지에 기반해 MC14에서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 영구화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해당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은 WTO에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을 무기한 연장하기 위한 ‘전자상거래에 관한 각료 결정 초안(draft ministerial decision on electronic commerce·Job/GC/WPEC/1)’2)을 회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MC13에서 채택된 기존 결정문(WT/MIN(24)/38–WT/L/1193)에는 ‘MC14 또는 2026년 3월 31일 중 더 이른 시점까지 전자적 전송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현행 관행을 유지하며, 해당 시점에 모라토리엄과 작업 프로그램이 종료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그러나 미국 초안은 이 문구에서 종료 시점을 삭제해 사실상 해당 약속을 영구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아가 목적상 ‘전자적 전송’에 ‘콘텐츠’를 포함할 것을 제시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해 일부 개발도상국은 미국 제안이 MC13에서 합의된 모라토리엄 종료 결정을 사실상 뒤집는 것이라며 강하게 발하고 있다.
디지털 무역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모라토리엄이 종료될 경우 개발도상국은 새로운 관세 수입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AI 역시 전자적 전송을 통해 국경을 넘나들며 기존의 물리적 수입 통제를 우회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국의 디지털 수입을 규제할 정책적 수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모라토리엄이 지속할 경우 딥페이크, 사이버 공격 등 AI 기반 도구가 사실상 무(無)규제 상태로 유입돼 국가 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무엇보다 WTO 회원국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이 콘텐츠까지 적용되는지, 아니면 전송 행위 그 자체에만 적용되는지를 둘러싼 이견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전자적 전송에 콘텐츠가 포함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할 경우, MC14에서 격렬한 정치적·법적 논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전자적 전송의 무관세 모라토리엄’이 사실상 ‘관세 부과’라는 현실적 압박과 맞물려 전개된다는 사실은 모순적이다. 특히 인도·브라질·남아공은 공교롭게도 모두 미국의 추가 관세 부과 대상이다.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이유로 미국의 추가 관세 25%를 부과받고 있으며, 남아공은 무역수지 불균형을 명분으로 최대 30%에 달하는 관세 압박에 직면해 있다. 브라질은 브라질 사법부의 전 대통령 기소 등 정치 상황을 문제 삼아 브라질산 제품에 대해 50%라는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이런 조치는 단순 통상 분쟁을 넘어, 미국이 디지털 무역 규범을 둘러싼 다자 협상에서 활용할 강력한 협상 카드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전자적 전송에 대한 무관세 모라토리엄 유지 또는 영구화 문제는 미국이 관세라는 전통적 제재 수단으로 주요 개발도상국 입장을 변화시키려는 전략과 직결돼 있다. 이번 MC14는 미국이 사실상 WTO 중심의 다자 통상 질서에서 벗어나 ‘턴베리 체제(Turnberry System)’3)를 선언한 이후에도 WTO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의지가 있는지 가늠하는 시험대로 여겨진다.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의 귀추가 주목된다.
용어설명
- 1전자적 전송(electronic transmissions)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
소프트웨어·음악·영화·전자책 등 인터넷을 포함한 전자적 수단으로 전송되는 디지털 상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한 WTO회원국 간 합의로, 글로벌 디지털 경제의 근간을 유지하는 핵심 규범 중 하나다. 1998년 도입된 이후 디지털 무역 활성화를 위해 관행적으로 연장돼 왔다.
- 2전자상거래에 관한 각료 결정 초안(draft ministerial decision on electronic commerce)
미국이 WTO에 제출한 공식 제안서로, 전자적 전송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을 한시적 연장이 아닌, 무기한 영구화할 것을 골자로 한다. 글로벌 디지털 무역의 법적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해 영구적 무관세 규범을 확립하려는 미국의 핵심 통상 전략이 담긴 문서다.
- 3턴베리 체제(Turnberry System)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글로벌 무역을 이끈 WTO 중심의 다자주의 체제를 대신해 미국의 일방주의와 양자 간 협상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글로벌 통상 질서. 2025년 7월 미국과 EU가 턴베리 합의를 통해 공고화한 이 체제는 다자간 규범보다 국익과 상호주의를 우선하며, 관세를 국가 간 협상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