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는 녹색 전환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고 혁신과 협력의 새로운 기회를 열었다. 우리는 이 같은 일련의 상황 변화를 유럽과 한국이 협력을 강화할 기회로 본다. 청정 기술 투자를 늘리고, 투명성을 제고하면서 건설적인 정책 관련 대화를 통해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이며 회복력까지 갖춘 미래 성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U(유럽연합)는 27개 회원국이 모인 ‘주권 집합체’다. 영국이 2021년 1월 브렉시트(Brexit)를 통해 탈퇴했지만, 여전히 약 4억5000만 인구를 아우르는 세계 최대 단일 시장을 유지하고 있다. 2024년 기준 EU의 국내총생산(GDP) 총합은 약 18조7000달러로, 미국(27조달러)에 이어 세계 2위 경제권이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주요 경제 대국이 포함돼 있고, 자동차·기계·화학·금융·농업 등 매우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높게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중 갈등 장기화로 인한 경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을 EU 시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유럽이 미국의 통상 압력과 중국의 저가 수출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만큼 한국과 EU가 다양한 분야에서 윈윈(winwin)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EU가 2026년 철강 수입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본격 도입하는 등 지속 가능성 증진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 한국과 EU 관계에서 극복해야 할 도전 또한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스테판 언스트(Stefan Ernst) 주한유럽상공회의소(ECCK) 총장은 최근 ‘통상’과 인터뷰에서 EU의 CBAM 도입은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글로벌 무역과 투자의 구조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며 “한국 기업과 투자자에게 이 같은 상황 변화는 투명한 탄소 회계와 신뢰할 수 있는 배출량 데이터, 검증 가능한 탈탄소화 전략이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닌 장기적인 경쟁력 제고와 시장 접근을 위한 필수 요소임을 뜻한다”고 언급했다.
ECCK는 한국과 연관돼 경제활동을 하는 유럽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2012년 설립된 비영리 조직이다. 한국에 진출한 EU와 유럽자유무역연합(EFTA)회원국 그리고 영국 기업을 대표한다. 350여 개 기업 및 단체를 회원사로 두고 있으며, 비즈니스 환경 및 경제 관련 정보 제공, 정책 제안,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한국과 유럽의 경제협력을 모색하는 역할을 한다. 독일 출신인 언스트 총장은 30년 경력의 글로벌 마케팅·경영 전문가다. ‘니베아 크림’으로 유명한 스킨케어 기업 바이어스도르프와 세계적인 광고 회사 액센츄어 송, 건축사무소 차벨파트너스 등에서 리더십 직책을 역임했다. 2010∼2013년에는 바이어스도르프 한국·대만지사 대표로 재직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EU의 CBAM 도입으로 한국 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전 세계 정부와 산업계가 저탄소 경제로 전환을 가속함에 따라 2026년은 글로벌 탈(脫)탄소화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EU의 CBAM 본격 도입은 이같은 전환을 주도할 주요 이니셔티브 중 하나이지만,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글로벌 무역과 투자의 구조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기업과 투자자에게 이 같은 상황 변화는 투명한 탄소 회계와 신뢰할 수 있는 배출량 데이터, 검증 가능한 탈탄소화 전략이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닌 장기적인 경쟁력 제고와 시장 접근을 위한 필수 요소임을 뜻한다.”
CBAM은 EU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55% 감축하는 ‘피트 포(Fit for) 55’ 계획의 일환이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며 생산된 제품을 EU로 수입할 때 EU 안에서와 같은 수준의 탄소비용을 부과하는 것이 골자다. EU ETS 유상할당 점진 도입에 따라 2026~2034년에 인증서 부담액이 점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기업이 대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보나.
“한국 정부가 2026~2030년 ‘제4차 배출권거래제(K-ETS)’ 할당 계획 시행에 돌입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일관된 측정·보고·검증(MRV) 시스템 확립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국 정부는 또한 기후에너지환경부(기후부)를 신설하면서 녹색 전환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고 혁신과 협력의 새로운 기회를 열었다. 우리는 이 같은 변화를 유럽과 한국이 협력을 강화할 기회로 본다. 청정 기술 투자를 늘리고, 투명성을 제고하면서 건설적인 정책 관련 대화를 통해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이며 회복력까지 갖춘 미래 성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2015년 아시아 최초로 배출권거래제를 도입했고, 2026~2030년 ‘제4차 K-ETS’ 할당 계획을 시행 중이다. 앞서 기후부는 제4차 할당 계획 기간에 발전 부문의 유상 할당 비율을 대폭 확대하고, 은행·보험사 등 기관 투자자의 시장 참여를 허용할 방침을 밝힌 바 있다.
2026년 주목해야 할 변화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기후 정책을 포함한 지속 가능성은 유럽에서 정책의제의 핵심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유럽지속가능성 보고기준(ESRS)에 따라 EU 시장 진출 기업은 앞으로 기업 지속 가능성 보고 지침(CSRD)과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CSRD 준수 의무는 향후 대기업 및 상장 중소기업으로 점차 확대될 예정이다. CSDDD는 2028년 7월부터 대기업을 대상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이 두 프레임워크는 투명성과 책임감, 지속 가능한 가치 창출에 대한 유럽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CSRD는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관련 정보 공시 강화이며, CSDDD는 기업이 공급망 전반에서 인권·환경 침해를 예방·식별·시정하도록 법적 책임을 부여하는 지침이다.
미·중 갈등으로 유럽 시장의 중요성이 커졌다.
“미·중 갈등 장기화로 글로벌 무역 지형이 재편되면서 무역 다각화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됐다. 유럽은 이 같은 변화 속에서 지속 가능성, 회복 탄력성, 규칙에 기반을 둔 협력을 토대로 한 ‘제3의 길’을 추구해 왔다. 신뢰와 투명성을 바탕으로 더 깊고 균형 잡힌 경제 관계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접근법이기에 한국의 이해와 동참이 매우 중요하다.”
유럽과 협력에서 한국은 어떻게 방향 잡아야 할까.
“한국은 국제 협력의 적극적인 참여자이자,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선도국이다. 또한 매력적인 무역 파트너이자 투자처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기업의 형사책임 제도를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도록 재검토하려는 한국의 최근 움직임은 기업 경영의 예측 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을 높이는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이 그런 방향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할 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혁신 원동력으로서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될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협력이 유망할까.
“유럽은 재생에너지와 해상 풍력발전1) 분야에서 특히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에 따라 ECCK와 산하 에너지·환경위원회는 해상 풍력발전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한국 정부가 2025년 3월 해상 풍력발전 보급 촉진 및 산업 육성에 관한 특별 법안(해상풍력특별법)을 공포한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발전이다. 이 같은 규제 개선은 유럽의 대(對)한국 투자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뿐만 아니라, 한국이 지속 가능 산업의 미래 허브로서 입지를 강화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해상 풍력발전은 바다에서 부는 바람을 전기로 전환하는 친환경 에너지 발전을 뜻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풍력발전이 2025년부터 원자력발전량을 넘어서고, 2035년에는 태양광발전에 이어 ‘글로벌 2위 발전원’이 될 것으로 본다. 다만 육지가 아닌 바다에 발전기를 설치한다는 점에서 공사가 어렵고 그만큼 관리가 까다롭다는 단점이 있다. 2026년 3월 시행을 앞둔 해상풍력특별법은 △국가 주도의 해상 풍력발전 개발 계획 수립 △계획 입지 제도 도입 △원스톱 인허가 체계 구축 △산업 육성 종합 대책 등을 담고 있다.
유럽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차별화된 경쟁력은.
“한국은 유럽 기업으로서는 매우 매력적인 강점이 여럿 있다. 앞선 디지털 인프라와 높은 교육 수준, 고도로 숙련된 인력 그리고 특히 정보통신기술(ICT), 자동차, 첨단 제조업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혁신 역량이 그것이다. 아시아의 경쟁국 사이에서도 한국이 상당히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럽 기업이 한국 시장을 어떻게 보고 있나.
“2012년에 설립한 ECCK의 회원사가 350개를 헤아리는 것만 보더라도 유럽 기업이 한국 시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전 회원사 중 유럽 태생이 아닌 기업 비중은 10%미만이라고 했다). 회원사와 관련 산업 분야 증가를 통해 유럽의 대한국 투자 관련 지속성과 다각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는 전통적으로 자동차·제약·화학 등 분야의 유럽 기업이 강력한 입지를 구축해 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재생에너지를 비롯한 친환경 에너지 분야, 특히 해상 풍력발전 관련 회원사 증가가 눈에 띄게 늘었다. 지속 가능한 성장에 대한 유럽의 확고한 의지와 포괄적인 노력이 한국의 친환경 에너지전환 노력과 점차 부합해 가고 있다는 신호다.”
앞으로는 어떨까.
“2025년 3월 한·EU 디지털 무역협정(DTA) 타결에 따라 앞으로 한·EU 디지털 무역 연결성도 더 촘촘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를 활용하려는 유럽 기업의 신규 한국 시장 진출 및 투자 증가도 예상할 수 있는 변화다.”
한국과 EU는 2023년 10월 DTA 협상을 개시한 뒤 일곱 차례 공식 협상을 거쳐 2025년 3월 타결을 선언했다. △종이 없는 무역 △전자 인증 및 전자 서명 △전자 지급 등 분야에서 상호 협력하고, △전자상거래에서 온라인 소비자 보호 △스팸 메시지 구제 수단 규정 △사이버 보안 협력을 추진하며, 데이터 이전 자유화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조치를 채택·유지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한·EU 경제협력에 영향을 줄 변수, 또 뭐가 있을까.
“2026년 유럽과 한국의 경제협력은 상호 규제 일치(regulatory alignment), 지정학적 역학(geopolitical dynamics), 산업 변혁(Industrial transformation)이라는 상호 연결된 세 가지 요소의 영향을 크게 받을 것이다. 유럽이 지속 가능성 의제를 강하게 밀어붙임에 따라 한국 기업이 거기에 얼마나 보폭을 맞출 수 있느냐가 향후 무역과 투자 관련 유대 강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이와 함께 글로벌 공급망 변동성과 지정학적 불확실성 증대로 한국과 유럽이 핵심광물, 에너지 안보, 신기술 관련 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커졌다. 앞으로 유럽과 한국은 디지털 거버넌스, 인공지능(AI), 첨단 모빌리티 등 분야에서 혁신, 투명성, 지속 가능성이라는 공유된 가치에 기반을 둔 공동 발전을 위한 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이다.”
용어설명
- 1해상 풍력발전
해상 풍력은 바다에서 부는 바람을 전기로 전환하는 친환경 에너지 발전을 뜻한다. 이를 위해선 바다에 풍력발전기를 설치해야 한다. IEA는 풍력발전이 2025년부터 원자력발전량을 넘어서고, 2035년에는 태양광발전에 이어 ‘글로벌 2위 발전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