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5일, 한·영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이 최종 타결됐다. 브렉시트 이후 한·EU(유럽 연합) FTA를 임시 연장하는 형태로 유지되던 양국 통상 관계가 2년간 협상 끝에 실질적 업그레이드를 이뤄냈다. 자동차 원산지 기준(RVC)이 55%에서 25%로 완화되고, 수리·재반입 관세 면제, 수출입 허가 투명성 강화 등 실무적 성과도 함께 도출됐다.
원산지 기준 완화와 실무적 개선
핵심 성과는 자동차 원산지 기준 대폭 완화다. 기존 55%에서 25%로 30%포인트 하향돼, 이번 완화로 원가 관리와 수출 여건이 개선됐다. 이에 따라 더 안정적으로 FTA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됐다. 특히 전기차의 경우 배터리 제조 과정에 투입되는 리튬, 흑연 등 수입 원료 가격에 따라 산출되는 부가가치가 크게 달라지는데, 이번 기준 완화로 한국 기업의 FTA 관세 혜택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동차 부품과 일반 기계 원산지 기준도 40%로 완화돼 협력사의 영국 수출에 긍정적 영향이 예상된다. 실무적 개선도 주목할 만하다. 수리·개조 후 재반입 상품에 대한 관세 면제가 신설돼 애프터서비스(A/S) 비용 절감이 기대된다. 수출입 허가 절차 투명성도 강화돼, 영국 정부가 새로운 허가 요건을 도입할 경우 30일 내 공표하고, 기업 문의에 60일 내 답변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됐다. 이로써 영국으로 차량을 수출해야 하는 기업에 크게 도움 될 전망이다.
ESG 기반 전기차 보조금 제도의 확산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는 자국산 우대 같은 무역제한 조치가 원칙적으로 금지되나, GATT제20조에 따라 ‘환경보호’나 ‘공중도덕’ 등 정당한 정책 목적이 있는 경우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최근 유럽 주요국이 전기차 보조금에 친환경 요건을 강화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는 2023년 녹색산업법(Green Industry Act)을 통해 차량 생산 전 과정의 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보조금을 차등 지급하고 있으며, 영국은 2025년 7월 전기차 보조금 제도인 ECG(Electric Car Grant)를 발표하며 제조사의 SBTi(Science Based Targets initiative·제조사의 과학 기반 탄소 감축 목표 설정 이니셔티브) 인증을 보조금 심사의 필수 선결 요건으로 지정했다. 두 제도 모두 친환경 정책 취지는 공감하나 사전에 충분한 의견 수렴 없이 시행되거나 역외 생산국에 구조적으로 불리한 기준이 적용되는 경우에는 관련 업계가 대응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英 전기차 보조금 위한 SBTi 인증, 민관 공조 성과
영국 ECG가 발표되자, 현대차·기아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아무리 친환경적인 차량을 생산하더라도 제조사가 SBTi에 가입돼 있지 않으면 보조금 심사 자체를 받을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당시 현대차·기아는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이니셔티브) 가입, CDP(탄소 정보 공개 프로젝트) A등급 등 다양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성과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SBTi는 미가입 상태였다. 문제는 SBTi 인증이 통상 12개월 이상 소요 예상된다는 점이었고, 별도 공청회 없이 즉시 시행된 제도에 단기간 내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산업통상부가 양국 정부 대화 채널을 신속히 가동하고 통상 장관 면담을 추진하는 한편, 기업 측에서도 주한 영국 대사관 면담, 영국 교통부·산업통상부 화상회의 등 다채널 아웃리치를 병행했다. 정부와 기업이 각각 역할을 분담하며 긴밀히 협력한 결과, 지난해 10월 말 현대차∙기아 모두 SBTi 인증을 각각 완료해 여러 EV 모델이 보조금 수혜 심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민관 협력, 글로벌 통상 대응의 핵심
앞서 살펴본 것처럼 각국이 ‘ESG 기준’을 활용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실무 현장에서 이러한 비관세장벽에 대응하다 보면, 기업 차원의 ESG 투자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1년 한·EU 개인정보 보호 적정성 결정(Adequacy Decision)과 2025년 9월 결실을 본 ‘양국 간 데이터 보호 규제 동등성 상호 인정’ 사례 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정부 간 긴밀한 협의를 통해 확보한 제도적 등가성(institutional equivalence)은 우리 기업의 행정적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핵심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ESG 분야에서도 이와 유사한 정부 간 상호 인정 체계 구축을 검토해 볼 만하다. 한편, 민간 기업 실무 일선에서 보면, 미국∙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 특정 역외국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가 의도치 않게 한국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향후 통상 협상 시 이러한 부분을 사전에 점검하고 원산지 기준 등을 면밀히 검토한다면, 불필요한 피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특정 통상 사안 발생 시 정부-기업-협회 간 원활한 소통을 통해 정확한 상황 파악과 일관된 대외 메시지를 전달할 다층적 소통 채널을 적시에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한·영 FTA 개정 협상은 업계의 실질적 애로 사항을 반영한 성공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한·영 FTA 개정 협상, 양국 교역 확대에 기여할 것”
이번 협상은 ‘상호 호혜적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주력 수출품에 대한 원산지 기준 완화로 양국 간 교역 확대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이 유럽 최대 전기차 시장으로 부상한 만큼, 현대차그룹은 ZEV Mandate(무공해차 의무 판매제) 충족은 물론 전기차 리더십을 강화해 나갈 것이다. 앞으로 글로벌 통상 환경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며, 이번 사례처럼 정부의 외교력과 기업의 현장 대응이 결합된 입체적 민관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이번 한·영 FTA 개정 협상과 SBTi 인증 대응이 향후 유사 사안에서 참고할 수 있는 성공적인 협력 모델로 기억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