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유럽연합(EU)의 디지털 정책을 겨냥한 조사 착수를 검토 중이다.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는 최근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EU의 디지털 규제가 미국 테크 기업을 차별하고 있다는 문제에 대해 협상을 통한 해결을 목표로 하되, 필요할 경우 무역법 301조 등 모든 대응 수단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했다. USTR는 EU와 일부 회원국이 미국 테크 기업을 상대로 소송, 세금, 벌금, 규제 지침 등을 통해 경쟁력을 제한해 왔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조치가 지속될 경우 EU에 대한 서비스 수수료 부과나 제한 등 무역 조치로 대응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미국은 특히 EU의 디지털서비스법(DSA)1)과 디지털시장법(DMA)이 형식상 국가 중립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미국 기업에 불리하게 작용 한다고 본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어 대표가 “무역법 301조 같은 수단은 협상을 통한 결과를 도출하도록 설계된 조사 도구”라고 언급한 점이다. 그는 미국과 EU 간 무역 갈등의 재현보다 기존 합의를 마무리하고 이행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강조했지만, 협상이 진전되지 않을 경우 무역법 301조에 근거한 조사는 현실적 선택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어 이에 대한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의회 설명 자료에 따르면, 1974년 무역법 제3편(301~310조·미 연방법전 19 U.S.C. §§2411-2420)에는 ‘불공정 무역 관행으로부터의 구제(Relief from Unfair Trade Practices)’라는 제목이 붙어있고, 통상 ‘301조(Section 301)’로 불린다.
미국 통상법상 핵심 수단으로 꼽히는 301조는 외국 정부의 무역 관행이 미국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미국 상거래(commerce)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될 경우, USTR이 조사와 대응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무역협정에 따라 보장된 미국의 권리가 부인됐거나, 외국 정부의 행위·정책·관행이 무역협정을 위반하거나 그와 불일치하는 경우, 또는 무역협정상 미국이 누려야 할 이익을 박탈하는 경우에 이에 따른 조사를 개시할 수 있다. 또 무역협정 위반 여부와 무관하게, 외국 정부의 조치가 ‘정당화할 수 없음(unjustifiable)’이거나, 미국의 상거래를 ‘부담하거나 제한함(burdens or restricts)’이라고 판단될 경우에도 조사 대상이 된다. 이때 법은 조사 대상 범위를 엄격히 제한하지 않으며 상거래의 개념 역시 상품 교역에 국한되지 않고 서비스와 투자까지 폭넓게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301조는 디지털 무역이나 플랫폼 규제와 같은 새로운 통상 쟁점에도 적용 가능한 법적 기반이다.
301조 조사의 개시가 반드시 정부 주도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다. 이해관계가 있는 개인이나 기업, 산업 단체 등 누구나 USTR에 조사를 요청하는 청원을 제출할 수 있다. USTR은 청원이 접수된 날로부터 45일 이내에 조사 개시 여부를 결정해야 하고, 조사 개시 여부와 관련한 상당한 재량이 USTR에 부여돼 있다. 아울러 USTR은 외부 청원이 없더라도, 직권으로(self-initiate) 조사를 개시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301조가 단순한 분쟁 대응 수단을 넘어, 미국의 통상 정책 방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전략적 도구로 기능하게 한다.
조사가 개시되면, 절차적 운영은 이른바 ‘301조 위원회(Section 301 Committee)’가 담당한다. 이 위원회는 USTR이 주도하는 범정부 협의체인 무역정책 실무위원회(TPSC) 산하에 설치된 실무급 기구로, 접수된 청원을 검토하고,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공청회를 개최하며, 조사 결과와 가능한 대응 조치에 대해 TPSC에 권고안을 제출한다. 조사 절차의 중요한 단계 중 하나는 외국 정부와 협의다. USTR은 조사 개시와 동시에 해당 외국 정부에 공식 협의를 요청해야 하며, 협의를 통해 상호 수용 가능한 해결책이 도출되지 않을 경우에는 세계무역기구(WTO)나 자유무역협정(FTA)에 규정된 분쟁 해결 절차를 요청해야 한다.
협의 절차가 종료되면, USTR은 외국 정부의 행위가 불공정한지, 혹은 무역협정에 따른 미국의 권리를 침해하는지 본격적인 판단에 착수한다. 조사 결과 미국 측 주장이 타당하다고 결론 나면, USTR은 구체적인 대응 조치를 결정하게 된다. 301조는 이 단계의 대응을 ‘의무적 조치’와 ‘재량적 조치’로 구분하는데, 만약 무역협정 위반이 확인되거나, 외국 정부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으면서 미국의 상거래를 제한한다고 판단될 경우, 원칙적으로 보복 조치 이행이 의무화된다.
최종 판단 기한은 사안에 따라 다르다. 무역협정위반과 직결된 문제는 분쟁 해결 절차가 끝난 후 30일 이내에, 그 외 일반적인 조사는 개시 후 12개월 이내에 판단을 마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 측 주장을 수용하는 ‘긍정적 판단’이 내려지면, USTR은 그로부터 30일 이내에 실제 보복 조치를 이행해야 한다. 301조가 허용하는 보복 조치 수단은 다양하다. USTR은 외국의 무역 관행을 시정하기 위해 관세 또는 기타 수입제한을 부과할 수 있고, 기존 무역협정상 제공해 온 양허를 철회하거나 정지할 수도 있다. 외국 정부와 구속력 있는 합의를 체결해 문제 된 행위를 중단하도록 하거나, 미국에 일정한 보상을 제공하도록 요구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 가운데 수입제한 조치를 선택할 경우, 법은 관세 부과를 우선하도록 규정한다. 트럼프 1기 정부(2017~2020년) 때는 301조에 따라 여섯 차례 외국 무역 관행을 조사했고, 이 중 중국과 EU에 대해 각각 관세를 부과2)했다.
이어 트럼프 2기 정부는 2025년 7월 디지털 무역 및 전자 결제 서비스, 관세, 지식재산권 보호, 반부패 집행, 산림 파괴와 관련된 브라질의 관행에 대해 조사를 개시했고, 이제 EU의 디지털 정책에 대해 301조를 활용할 기세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미국은 한국과 통상 협상 과정에서도 망 사용료 제도나 온라인 플랫폼 규제 등 디지털 서비스 관련 정책이 결과적으로 미국 테크 기업을 겨냥한 조치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해 왔다. 특히 이러한 규제가 형식상으로는 국가 중립적 구조를 띠고 있더라도, 실제 집행 과정에서 미국 기업에 불균형적인 부담을 초래할 경우 301조 같은 통상 압박 수단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시사해 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EU뿐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주요 교역국과 협의 과정에서 디지털 규제를 핵심 통상 쟁점으로 전면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향후 한·미 통상 관계에서도 디지털 정책은 단순한 산업·규제 논의를 넘어 통상 분쟁 가능성을 내포한 사안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으로서는 국내 산업보호와 공정 경쟁이라는 정책 목표를 유지하면서도, 해당 제도가 국제 통상 규범 및 FTA상 의무와 충돌하지 않도록 정교한 제도 설계와 외교적 설명 노력이 병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용어설명
- 1디지털서비스법(DSA)
EU가 2024년 2월부터 모든 온라인 플랫폼에 전면 적용한 콘텐츠 안전 규제. 앞서 20여 년 전 제정한 기존 전자상거래 지침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해진 가짜 뉴스, 혐오 표현, 알고리즘 부작용 등 현대적 디지털 유해 환경에 대해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됐다.
- 2중국과 EU에 대해 각각 관세를 부과
USTR은 2018년 중국 정부의 강제적 기술이전 요구와 지식재산권 침해 여부를 조사해 25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대해 네 차례에 걸친 보복관세를 부과했다. 또 2019년 USTR은 프랑스 항공기 제조사 에어버스에 EU가 불법 보조금을 지급해 미국 보잉이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 EU산 항공기(10%)와 와인, 치즈 등 농축수산물(25%)에 보복관세를 부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