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트렌드 통상 트렌드 통상 환경 변화와 철강·車·배터리 등 주력 산업 대응 전략
  • 정은진 서울세관 수출기업지원센터 기업지원1팀장
  • 과거의 무역 규범이 관세 중심의 비교적 단순한 장벽이었다면, 지금의 통상 규범은 탄소, 노동, 공급망, 안보, 데이터까지 포괄하는 복합 규제 체계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 주력 산업인 철강·자동차·배터리는 통상 환경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공통으로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동시에 규제가 집중되는 품목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산업은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축이라는 점에서 규제 대응 수준이 곧 산업 경쟁력으로 직결된다.

    철강 산업: ‘삼중 규제 산업’으로 변화

    철강 산업은 전통적으로 통상 규제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 성격이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이 도입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우리 철강 기업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정책 중 하나다. CBAM은 EU 역내 생산품에 적용되는 탄소 비용을 역외 국가에도 동일하게 요구하는 제도로, 수출 기업은 제품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배출량을 신고하고 그에 상응하는 CBAM 인증서를 구매해 제출해야 한다. 인증서 가격은 EU배출권거래제(ETS)의 탄소 가격과 연동되기 때문에, 탄소 배출량이 많은 철강 산업은 제도 시행에 따른 재무적 영향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철강 품목 CBAM 인증서 구매 비용을 2026년 851억원, 2034년 5589억원 수준으로 추산했다. 2026~2034년 9년간 누적 부담액이 약 2조 64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했다. 이는 CBAM이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니라, EU 수출에서 가격 경쟁력의 룰을 바꾸는 구조적 규제임을 보여준다.

    미국의 무역확장법 제232조 철강·알루미늄 규제 또한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 정부와 세관은 한국산 철강에 대해 우회 수입 여부와 최종 용도 확인을 점점 더 엄격히 들여다보고 있다. ‘중국산 소재 사용 의심’을 사유로 한 미국 수입자의 서면 질의와 자료 요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일부 기업은 공정도, 원재료 구매 자료를 즉시 제출하지 못해 수일간 통관 지연을 겪는 사례도 현장에서 보고되고 있다. 강제 노동 규제 역시 철강 공급망을 압박하는 새로운 변수다. 미국은 위구르 강제노동방지법(UFLPA)에 따라 위구르와 연관된 노동·원재료가 개입된 제품은 원칙적으로 통관을 허용하지 않으며 ‘강제 노동과 무관함’을 입증할 책임은 수입자에게 있다. 미국 국토안보부(DHS)에 따르면, UFLPA발효 이후 2025년 중반까지 1만6700건 이상, 약 37억달러 규모의 선적이 강제 노동 관련 심사·집행 대상이 된 것으로 집계됐다. 철강의 전구체 역할을 하는 알루미늄·망간·실리콘 등 금속 원재료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만큼, 이 규제의 파급력은 적지 않다. 결국 철강 산업은 탄소(CBAM), 안보(제232조), 공급망, 강제 노동(UFLPA)이 동시에 작동하는 ‘최고난도 규제 산업’으로 이미 자리 잡고 있다.

    자동차 산업: 글로벌 공급망 규제의 한가운데

    자동차 산업은 상황이 다르지만, 그 복잡성은 오히려 더 심하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완성차는 2만 개가 넘는 부품으로 구성되고 공급망 단계도 1차에서 3·4차 협력사까지 길게 뻗어 있어 규제의 영향을 가장 빠르게 체감하는 업종이다. 최근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원산지 검증에서 자동차·부품 품목에 대한 미국 세관(CBP)의 사후 검증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공급 업체의 공정·비용 자료 제출 요구가 일상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UFLPA는 한국 자동차 공급망에 새로운 규제 리스크를 만들었다. UFLPA 집행 통계를 보면, 2022년 이후 전자·산업재·농산품에 더해 자동차 및 관련 부품이 주요 타깃 섹터로 빠르게 부상했다. 전장 부품, 알루미늄 부품, 와이어링 하네스처럼 중국 의존도가 높은 부품군은 더욱 철저한 소명이 필요해졌다. 원재료 어느 단계에서 중국 또는 신장 관련 공급망이 개입했는지를 확인할 수 없으면, 완성차 전체의 통관이 지연될 수 있다.

    자동차 산업이 맞닥뜨린 또 하나의 굵직한 이슈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다. IRA는 전기차 세액공제의 핵심 요건으로 ‘북미 생산’과 ‘비(非)중국 공급망’을 내세우며 핵심광물과 배터리 부품 단계에서 중국 등 ‘해외 우려기관(FEOC·Foreign Entity of Concern)’을 단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그 결과, 과거 단가 경쟁 중심의 조달 체계는 규제 준수, 공급망 투명성, 탄소 기준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이 명확해지고 있다. ‘어디서, 어떤 조건으로 만든 부품인가’가 ‘얼마나 싼 부품인가’보다 더 중요한 경쟁 변수로 떠오르는 것이다.

    배터리 산업: ‘규제 집약 산업’

    배터리 산업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규제를 동시에 받는 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5년 7월 통과된 미국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BBBA·One Big Beautiful Bill Act)’은 금지외국 기관(PFE) 요건을 도입, 기존 해외우려기관(FEOC)조치를 강화했다. 문제는 공급망의 현실이다. 흑연의 경우 전 세계 공급의 90%가 중국에서 생산되며 전구체·양극재·분리막 등 여러 핵심 소재의 중국 비중도 50~70%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한국 배터리·소재 기업이 가장 심각하게 직면한 규제·공급망 리스크다.

    EU는 2023년 제정한 ‘EU 배터리 규정’를 통해 2025년부터 탄소 발자국 보고를 의무화할 계획이었으나 하위 법령이 지연되며 업계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 2025년 2월 발표된 ‘옴니버스 패키지’도 혼란을 키운다. 여기에 철강·알루미늄·전력 부문까지 CBAM이 적용되면, 배터리 제조 과정 대부분이 탄소 규제의 영향권에 들어간다. 실제 국내 배터리 기업은 이미 대응 비용을 실감하고 있다. 한 배터리 제조 기업은 EU 납품을 위해 제품 단위 탄소 배출량(LCA) 시스템을 구축하며 수십억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했고, 또 다른 기업은 IRA 요건 충족을 위해 호주·아프리카 광산과 직접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등 공급망 다변화에 나서고 있다. 배터리 산업은 향후 10년간 탄소와 공급망 규제가 기술·원가·생산지를 모두 결정짓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단가 중심 경쟁에서 탄소 경영, 원산지 투명성, 로컬 생산 전략 중심 경쟁으로 산업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규제 대응이 산업 경쟁력의 핵심으로 이동하는 시대

    철강·자동차·배터리 산업은 서로 다른 이유로 각각의 규제를 마주하고 있지만, 공통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갖춰야 할 필수 요건이 명확해지고 있다. 첫째, 공급망 투명성이다. 원산지, 노동기준, 탄소 배출량을 입증할 수 있는 데이터가 없으면 더 이상 주요 시장에 접근하기 어렵다. 둘째, 저탄소 전환이다. 철강과 배터리뿐 아니라 자동차와 기타 제조업도 앞으로는 ‘탄소를 줄인 공정’ 자체가 경쟁력이 된다. CBAM, EU 배터리 규제처럼 탄소 강도를 직접 가격·시장 접근 요건에 연동하는 규제가 확산하는 만큼, 공정 개선, 연료 전환, 재생에너지 도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셋째, 준법·리스크 관리 체계 구축이다. 강제 노동, 원산지, 탄소 규제는 한 번 억류·조사 대상이 되면, 브랜드 신뢰와 거래 관계에 장기적인 상처를 남긴다.

    과거에는 규제 대응이 ‘문제 발생 후 보완’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문제 발생 전 대응’이 생존의 전제가 되었다. 앞으로 5~10년은 한국 제조업의 근본 경쟁력이 재편되는 시기다. 지금이 바로, 탄소·노동·공급망·원산지를 하나의 축으로 묶어 기업 경쟁력의 새로운 핵심 요소로 재정의해야 하는 시점이다. 한국의 철강·자동차·배터리 산업이 이 변화의 파고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