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025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한·미 관세 협상을 최종 마무리해 양국 협력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발표된 공동 팩트시트(Joint Fact Sheet)1)에 따르면, 양국은 상업적 합리성에 기반한 투자 원칙을 확인하고, 조선·원전 등 전통 산업에서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 분야에 이르기까지 포괄적 협력 강화를 합의했다. 여기에 원자력 추진 잠수함(원잠) 건조 추진, 이에 따른 우라늄 농축,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대, 미 해군 함정 한국 내 건조 가능성 등 안보 분야에서도 전략적이면서 중대한 진전을 도출했고, 주한 미군 주둔과 확장 억제 공약 재확인을 통해 안보 동맹을 공고히 했다.
가히 이번 합의는 경제·안보·기술을 포괄하는 미래형 전략 동맹 구축 의지를 내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주목할 부분은 이른바 ‘테크딜(Tech Deal)’이다. 2025년 10월 29일 한·미 양국은 ‘한·미 기술 번영 양해각서(Memorandum of Understanding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regarding the ROK-U.S. Technology Prosperity Deal)’2)를 체결, 글로벌 기술 환경의 구조적 변화에 공동 대응하고, 차세대 혁신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전략적 협력 비전을 제시했다. 양측은 과학기술 역량의 선도적 발전이 국가 번영과 국제적 안정성 유지의 핵심 동력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를 토대로 동맹 관계를 기존 안보 중심에서 기술·산업·혁신 동맹으로 심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확인했다. 이 양해각서는 두 나라가 공유하는 민주적 가치와 개방적 혁신 체제에 기반해 △AI △ 양자 기술 △ 바이오·의약품 △우주탐사 등 전략 분야에서 상호 보완적 협력 구조를 구축, 차세대 기술 패러다임을 공동으로 선도하려는 목적이 있다.
특히 AI는 이번 협력의 중심축이다. 한국과 미국은 AI가 혁신 범위를 기존 디지털 산업에서 벗어나 △과학 연구 △ 첨단 제조 △ 의료·바이오 △ 교육 등 전 영역으로 확장하는 범용 기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관련 정책·산업·표준·데이터 생태계 전반에서 포괄적인 협력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미국 국립과학재단(NSF), 한국연구재단(NRF),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등을 중심으로 공동 연구 개발(R&D) 프로그램을 확충하고, 혁신 친화적 규제 프레임워크를 마련해 △AI 기술 스택의 국제적 수출 협력 △AI 데이터 세트 구축 △기술 보호 조치 강화 등 다층적 협력 과제를 추진하기로 했다.
또 △AI 산업 표준화에서 공동 대응 △안전·신뢰성 검증을 위한 측정학 및 안전성 연구 △아동·청소년 디지털 안전 환경 조성 등 사회·윤리적 과제를 포함한 종합적 협력 체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기술 신뢰성·공급망 안정성 또한 이번 양해각서의 핵심 요소다. 양국은 연구 안보를 국가적·동맹 차원의 필수 전략 과제로 인식해 △산업계, 학계, 연구 기관(산학연) 역량 강화 △위협 정보 공유 △신흥 기술 연구에 대한 안전장치 마련 등으로 안전한 연구 생태계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통신 분야에서는 6G(6세대)를 포함한 차세대 무선 접속망 기술 개발과 글로벌 표준 형성 과정에 공동으로 참여,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과 상호 운용성을 기반으로 한 기술 리더십 확보를 추구한다.
바이오·의약품 분야의 공급망 회복력 제고를 위해선 R&D 단계부터 생산·운영까지 전 주기에 걸친 협력 체계를 마련해 정부·산업계·학계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아우르는 구조적 협력 모델을 구축할 계획이다. 양자 기술 협력은 미래 전략산업 주도권 확보를 위한 핵심 의제로 설정됐다. 한국과 미국은 신뢰 기반 양자 생태계 조성을 위해 △ 양자 표준 개발, 연구 기관 간 협력 심화 △공급망 안전성 확보 등을 공동 추진한다.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대형 연구 프로젝트 참여 확대와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matics·과학, 기술, 공학, 수학) 연구자 교류 활성화를 통해, 장기적 과학기술 경쟁력 기반을 강화할 계획이다. 우주 분야도 △미 항공우주국(NASA) 주도 아르테미스 계획(Artemis Program)3) 참여 △한국형 위성항법체계(KPS)구축 협력 △상업용 저궤도 정거장 개발 등에서 양국의 역할을 넓혀, 민간·국가 우주 역량의 동반 발전을 도모하기로 했다.
한·미 양해각서 체결은 양국의 정책적 의지와 협력 방향성을 제도화하는 중요한 단계다. 양해각서가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진 않지만, 기존 협정과 충돌을 피하면서도 미래지향적 기술 협력 체계를 공고히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런 구조적 협력 틀은 글로벌 기술 경쟁의 변곡점에서 상호 신뢰 바탕의 전략적 협력 모델을 구축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는 동시에, 동아시아 및 인도·태평양 지역의 기술·안보 환경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영국·일본과도 각각 기술 번영 관련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9월 18일(이하 현지시각) 미·영은 과학기술 역량 강화로 차세대 혁신을 주도하기 위해 기술 번영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두 나라는 △AI·원자력·양자 기술 등 전략 분야에서 공동 연구 △인프라 구축 △데이터·모델 공유 △규제 조화 △인력 양성 등을 추진한다. 또 △AI 연구 자원 연계 △ 차세대 원자로·핵연료 협력 △양자 알고리즘 개발·표준화 △6G·사이버 안보 등 기반 기술 강화에 중점을 둔다. 10월 28일 일본과 체결한 양해각서에는 △AI 활용 촉진을 위한 정책 조화 △반도체, 고성능 컴퓨팅 기반 확충 △연구 보안 강화 △5G(5세대 이동통신)·6G와 개방형 네트워크 협력 △제약·바이오 공급망 회복력 제고 등이 주요 과제로 담겼다. 여기에 △양자 알고리즘 개발·실증 △첨단 우주탐사 △융합 에너지 연구 협력 등의 내용도 들어갔다.
미국이 각국과 체결한 기술 번영 양해각서를 보면, 한국과 협력은 영국·일본과는 구별된다. 한국과 양해각서는 AI·반도체·데이터 인프라 협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기업 규제 부담을 줄이고 혁신적 데이터 호스팅 구조를 개선하는 등 산업 운영 환경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 한국 정부는 해당 양해각서를 기술 주권 강화 관점으로 설명, 단순 협력을 넘어 국가 전략적 역량을 공동으로 확보하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더불어 양국이 구체적 협력 로드맵과 실행 체계를 마련하기로 한 점도 영국·일본과 협력 문서보다 실무적 성격이 강하다. 최근 중국이 AI 모델의 기술 고도화로 세계 최고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 중국에 이어 AI 3강을 추구하는 한국은 미국과 국제 협력이 절실하다. 이 때문에 이번 테크 딜은 관세 협상의 내용을 뛰어넘는 새로운 길을 한국에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용어설명
- 1공동 팩트시트(Joint Fact Sheet)
정상회담이나 고위급 회담이 끝난 뒤, 두 나라가 합의한 구체적 성과나 세부 사항을 정리해 발표하는 설명 자료 또는 사실 목록. 공동성명 등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실행 계획, 수치, 개별 프로젝트 목록을 담고 있다.
- 2기술 번영 양해각서
미국이 자국 취약점인 제조역량을 첨단 양산 기술로 보완해 산업 생태계를 복원하려는 전략.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을 구축하고, AI·6G 등 미래 기술 표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동시에 안보 동맹을 기술 동맹으로 확장해 미국 중심의 기술 블록을 완성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 3아르테미스 계획(Artemis Program)
1972년 아폴로 프로젝트 종료 이후 약 50년 만에 인류를 다시 달에 보내려는 NASA 주도의 국제 유인 탐사 프로젝트. 지속 가능한 달 상주 기지와 궤도 우주정거장 건설을 목표로 한다. 한국은 2021년 세계에서 10번째로 약정에 서명해 공식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