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촉발된 공급망 충격과 미·중 경쟁 심화로 세계무역 질서가 흔들리는 가운데, 2025년 1월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이하 트럼프 정부)의 ‘고율 관세정책’은 글로벌 가치 사슬의 변화를 더 가속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제조업 부활과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우방국끼리 공급망 구축)을 내세워 자국 이익은 물론, 동맹국과 결속을 강화하려 하지만, 고율 관세정책이 공급망 불확실성을 야기하고 있다. 중국은 대외적으로는 개혁·개방과 수출 경제를 유지하고, 이와 동시에 내수를 활성화해 경제성장의 두 동력으로 삼는 쌍순환 전략(Dual Circulation Strategy)을 내세운다.
유럽연합(EU) 역시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1)을 내세우며 무역과 투자 블록화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복잡하게 얽힌 무역 구도 속에서 반도체와 배터리, 첨단 소재 등 글로벌 공급망 핵심 고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미·중 사이 전략적 균형도 모색해야 한다. 최근 미국의 대(對)중국 추가 관세 부과 가능성이 커지고, 공급망 재편 논의도 끊임없이 나오면서 한국이 어떤 산업 전략과 외교적 대응을 준비해야 할지 중요해지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과 기업 전략의 전문가 윌리 C. 시(Willy C. Shih)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한국 기업은 다양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어서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며 “공정 기술에 꾸준히 투자해야 하고, 새로운 제조 방식에도 민첩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 교수는 또 “트럼프 정부의 발언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며 “‘비이상적’이라고만 치부하지 말고, 그 속뜻을 이해하는 것이 파트너십 강화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트럼프 정부의 고율 관세정책으로 글로벌 공급망 구조가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1기 정부(2017~2020년)부터 이미 일부 산업 분야에서 공급망 다변화가 시작됐다. 트럼프 2기 정부 때는 이런 흐름이 더 빨라졌다. 미·중 간 직접 수출이 현저히 감소하고, 동시에 중 국에서 동남아시아와 기타 차이나 플러스 원(China Plus One·중국에 집중된 제조 시설을 중국 외 지역에 추가로 구축해 공급망 리스크를 낮추는 것) 국가로의 수출이 늘어난 점,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같은 국가에서 미국으로의 수출이 비례적으로 증가한 점을 보면 이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내에서는 이런 현상을 재선적(transshipment)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중국의 원자재와 중간재가 이들 차이나 플러스 원 국가로 보내져 완제품으로 조립된 후 미국으로 수출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으로 생각한다. 필수 부품을 여전히 중국에서 조달해야 하는 서방 기업과 미국 고객을 위해 이들 국가에 공장을 설립하는 중국 기업에 의해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어쨌든 무역 수치를 보면 이런 변화는 매우 중요하다.”
한국은 어떤 전략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고 보나.
“트럼프의 거래적(transactional) 무역정책2)은 양국 간의 무역 불균형으로 촉발됐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미 정부의 고율 관세는 막대한 대미 무역 흑자를 기록한 국가에 공통으로 부과됐다. 이 모든 관세는 1977년 제정된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따라 행정명령으로 부과되는데, 이 법은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국제경제 거래를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미 정부는 규제의 정의에 관세 부과가 포함된다고 주장하나, 최근 미국 법원의 심리에서 많은 회의론이 제기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한국은 15%(관세율)라는 잠정적 합의를 이룬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관세율이 ‘기본’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서명될 최종 합의에서 어떤 품목이 제외되는가다. 2025년 7월 31일(현지시각) 자 트럼프 행정명령에는 ‘일부 교역 파트너가 미국과 의미 있는 무역 및 안보 약속에 동의했거나 동의 직전에 있다’고 명시됐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평판디스플레이와 조선업 등 여러 분야에서 중국 공급망의 유일한 대안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스위스는 39%의 관세 폭탄을 맞았지만, 금과 의약품이 면제되면서 실효 관세율이 약 12%에 그쳤다. 브라질은 50% 관세율을 적용받았는데, 수출 품목의 약 50%가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분야에서는 협상의 여지가 있다.”
중국이 ‘쌍순환 전략’에 집중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공급망 안정성 확보를 위해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
“쌍순환 전략은 건설적인 무역 관계를 해친다. 다른 나라가 자국의 물건을 사주길 바란다면 중국 역시 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중국은 단순히 다른 나라 시장에 의존해 자국민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실업률을 수출하는 셈이 된다. 한국은 과소평가됐던 여러 부문에서 전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뛰어난 역량이 있다. 한국은 많은 국가에 중국의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트럼프 정부의 예측 불가능한 접근 방식은 기업 투자와 생산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한데.
“불확실성이 기업의 투자를 미루게 하는 건 분명하다. 트럼프 정부는 큰 규모의 거래를 좋아하지만, 얼마나 많은 거래가 성사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기업은 수년간의 투자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주요 투자 결정에 매우 신중하다. 모든 것이 내년, 심지어 다음 달, 혹은 내일이라도 바뀔 수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의 고율 관세 체제에서 한국이 동맹국 면제나 우대 조치를 확보하기 위해 어떤 외교적·산업적 조건을 충족해야 할까.
“매우 전략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는 텍사스에 반도체 관련해 많은 투자를 했고, 이는 트럼프 정부가 (한국의 노력을) 일정 부분 인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은 미국산 수출품을 더 많이 구매하는 것이다. 많은 국가가 보잉 여객기나 액화천연가스(LNG)를 더 많이 구매할 것을 약속했다. 트럼프의 관심은 양국 간 무역이므로 이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 서비스 구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향후 5년간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무엇이고, 한국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
“한국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미국이 역사적으로 이런 정책을 추진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우고, 지금보다 개선하기를 바랄 뿐이다.”
용어설명
- 1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
미국이나 중국 등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역량으로 안보·경제·기술·외교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본래 군사·안보 분야에서 출발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중 갈등,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공급망 불안 등을 계기로 반도체·배터리·에너지·디지털 기술을 포괄하는 영역에서 쓰이는 개념으로 확대됐다.
- 2거래적(transactional)무역정책
자유무역이나 다자 규범보다 당장의 국익과 교환 조건을 우선시하는 접근으로 ‘너희가 이것을 내주면, 우리는 저것을 내준다’는 식의 단기적 흥정에 기반한다. 거래적 무역정책은 단기적으로협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글로벌 무역 질서의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훼손하고, 동맹국 신뢰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