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5개 중소기업과 12개 주(州) 정부가 4월 14일(이하 현지시각)과 4월 23일 각각 연방 정부를 상대로 1977년 입법된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동한 펜타닐 관세와 58개국에 대한 상호 관세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연방국제무역법원(CIT)은 5월 28일 IEEPA는 미 대통령에게 펜타닐 관세 및 상호 관세 발동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다음 날인 5월 29일 미국 컬럼비아 특별구 지방법원도 CIT와 유사한 판결을 내렸다. 트럼프 행정부는 판결 직후 미국 연방순회항소법원(CAFC)에 즉각 항소했고, CAFC는 CIT의 관세 행정명령 무효 판결의 집행을 항소심이 나올 때까지 일시 중단시켰다. 즉, IEEPA 기반 관세가 당분간 유지될 수 있게 트럼프 대통령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CIT는 1926년 설립된 관세 법원으로 1980년 무역 전문 연방 법원으로 승격되었다. CIT 소재지는 뉴욕이며 무역 관련 조약·법률 해석 전문 법원이다. 주로 미국 세관국(CBP)의 관세 결정에 대한 불복, 국제무역위원회(ITC)의 덤핑·보조금 판정에 대한 소송, 상무부의 무역 구제 조치에 대한 소송, 1962년 무역확장법 232조(국가안보)와 IEEPA 등 대통령의 관세 부과 행위에 대한 합헌성을 판단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초부터 많은 국가에 관세를 부과하기 위해 IEEPA를 발동해 왔다. 철강·자동차에 대한 품목별 관세는 232조를 발동했지만, 232조는 국가 안보에 대한 영향을 사전에 조사해야 한다.
이에 비해 IEEPA는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로 선언해 발동 요건을 충족하면 바로 관세 조치를 취할 수 있다. IEEPA는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 즉시 발동이 가능하나 IEEPA가 관세 조치를 허용하는가는 논란이 있었다.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헌법에 근거해 의회가 통상 정책 권한을 갖고 있고, 대통령에게 제한된 범위와 요건하에 관세정책을 위임하고 있다.
IEEPA 관세 소송 및 판결
5월 28일 CIT 세 명의 판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IEEPA에 근거해 부과한 모든 관세를 만장일치로 위헌판결을 내렸다. 이런 판결에는 캐나다, 중국, 멕시코에 대한 관세는 물론 상호 관세도 포함된다. 법원은 트럼프가 IEEPA에서 부여된 권한을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이는 트럼프 무역정책에 있어 가장 중 대한 법적 좌절로 평가된다. 트럼프 정부는 즉시 항소를 통해 판결의 임시 집행정지를 받아내 6월 9일까지는 IEEPA에 따른 관세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항소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IEEPA 외에도 301조(불공정 무역 관행)나 232조를 활용해 특정 국가나 제품에 대한 관세를 다시 부과할 수 있으며, 국제수지 적자를 근거로 122조를 활용해 15%의 임시 관세를 부과하는 우회 조치를 모색할 수 있다. 하지만 우회 조치는 시간이 걸리고 제약 요건이 있으며 또 다른 사법적 쟁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조치가 사법적 판단을 받게 됨에 따라 관세 협상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CIT 판결은 무역 문제에 대한 행정부와 의회 간 권력 균형에 있어 사법적 개입을 한 것이다.
미 외교 전문 기관인 대외관계위원회(CFR)는 이번 CIT 판결을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했다. CIT 판결은 무역정책이 대통령의 일방적 결정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사법부와 의회가 여전히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향후 트럼프가 우회 수단을 동원해 유사한 관세 체계를 발동하더라도 대통령의 관세정책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보였다.
CFR의 벤 스틸 국제경제국장은 대통령 권한 남용에 대해 반격을 가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번 판결은 수십 년간 IEEPA 등 대통령 권한이 무분별하게 확장되어 온 흐름에 제동을 거는 조치다. 트럼프 정부는 항소하는 한편 232조 및 301조를 통해 관세를 다시 부과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무역 상대국과 협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며 향후 관세의 합법성을 둘러싼 분쟁이 몇 달간 지속될 수 있다. 브래드 W. 세처 CFR 선임연구원은 대통령이 즉흥적으로 중국에 145% 관세를 부과하고, 장관급의 이틀간 협상으로 이를 30%로 내리는 등 임의적 조치가 더 이상 IEEPA에 의해 가능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는 본래 IEEPA의 제재 목적인 ‘진정한 비상사태’에 한정돼야 한다는 취지에 부합해야 함을 의미한다. 현재 진행 중이거나 계획된 232조 조치만으로도 미국 무역의 약 40%(GDP의 약 4%)를 커버할 수 있으며 유럽연합(EU), 한국, 일본, 대만 등은 자동차, 반도체, 항공 분야에서 높은 관세를 부과받고 있다. 301조를 통한 중국에 대한 30% 관세 재부과도 가능하며, 베트남처럼 공산당이 지배하는 비시장경제 국가를 대상으로 301조 조치도 검토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조치는 더 많은 시간과 절차를 요구하며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관세를 조정하는 것은 어려워질 것이다.
핵심 쟁점 및 전망
CIT의 이번 판결은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비상 권한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국가 비상사태를 가장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에 대해 경고하며, 관세에 대한 의회의 헌법적 권한 회복을 주문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CIT 판결로 인해 트럼프 무역정책이 중대한 견제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판결이 유지되더라도 관세정책이 종료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백악관이 우회 수단을 모색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1기 정부에서 보호무역정책 설계자였던 로버트 라이트 하이저 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서울에서 개최된 포럼에서 CIT 판결에도 “관세전쟁의 끝을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보편적 관세 부과에는 제약이 있을 수 있으나, 232조에 근거해 특정 품목 혹은 301조 발동으로 특정 국가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도구(tool)를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라이트하이저의 판단은 백악관의 입장과 일치한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CIT 판결 다음 날 법원의 결정을 “사법 과잉”이라며 “법원에서 해당 판결이 유지되더라도 관세 부과를 위한 다양한 법적 수단이 있기 때문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른 나라와 관세 협상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은 보수 성향과 진보 성향 비율이 6 대 3으로,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트럼프 관세정책이 사법 분쟁화함에 따라 미 통상 당국의 협상 일정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미국과 관세 협상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철강과 자동차에 대한 품목별 관세는 CIT 판결 대상이 아니며, 트럼프 대통령이 232조와 301조를 확대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보수 성향이 강한 연방대법원에서 CIT 판결을 뒤집을 수도 있다. 6월 3일 대통령 선거로 집권한 새 정부는 전 정부에서 미국과 협의해 온 사항을 바탕으로 관세 협상 타결 전략을 수립하는 동시에 대미 관세 협상을 이어달리기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