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달러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 기축통화로 군림해 온 달러는 최근 들어 점차 그 지위를 잃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복귀하면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대한 정치적 압박 등 미국 내 정책 불확실성이 커지면서다. 일각에선 ‘탈(脫)달러(de-dollarization)’라는 용어까지 등장하며, 새로운 글로벌 통화 질서에 대한 논의가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제통화 제도 전문가인 배리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 미국 UC 버클리 경제학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달러 패권이 점진적으로 약화하고 있으며, 혼란스러운 미국 정책이 그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달러의 위상은 연준 독립성과 신뢰성에 기반한다”며 “정치적 압력이 심화할 경우, 달러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현재 어떤 상태인가.
“달러의 글로벌 지위는 지난 25년간 매우 천천히, 얼음이 녹듯 점진적으로 약화해 왔다. 25년 전에는 달러 비중이 세계 외환보유액1)의 70%를 넘었지만, 지금은 60% 이하로 줄어든 상태다. 2011년 출간한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에서 다극화하는 글로벌 통화 체제로 전환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동성 공급원이 하나만 있는 것보다는 여러 개 있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트럼프 정부의 변덕스러운 정책으로 인해 달러에 대한 급작스러운 회피 움직임이 나타날 가능성도 생겼다. 그렇기에 달러 지배력은 현재 더 위협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준 독립성과 신뢰성이 달러 위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현대의 주요 국제통화는 사실상 모두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뒷받침을 받아왔다. 과거 파운드화 시절의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네덜란드에서 쓰였던 길더화 시절 암스테르담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연준 독립성은 달러의 국제적 위상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준 압박이 달러 신뢰도를 낮출 수 있나.
“그렇다. 트럼프는 ‘저금리 지지자’를 자처한다. 그는 연준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준금리를 지나치게 낮추도록 압박할 수 있다. 그러면 시장에 중앙은행이 달러 신뢰도를 신중하게 관리하고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구심을 일으키게 할 수 있고, 결국 달러가 신뢰할 수 있는 가치 저장 수단인지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의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 증가가 달러 신뢰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나.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 문제를 방치하면, 결국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통해 부채를 상쇄하라는 압력을 받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시장에서 제기될 수 있다. 이는 연준과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우려와 맞물려, 달러의 신뢰도·매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5월 16일(현지시각)미국의 신용등급을 최고 등급인 ‘Aaa’에서 ‘Aa1’으로 한 단계 강등했다. 이 같은 결정이 외국인 투자자의 달러 자산 수요에 영향을 줄까.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른 신용평가사는 이미 하향 조정했고(미국은 2011년 S&P, 2023년 피치 강등에 이어 3대 신용평가사 모두 최고 등급 지위를 잃었다), 현재 등급도 여전히 ‘투자 적격’ 수준이다. 기관투자자의 행태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외국 중앙은행이 미국 국채 비중을 줄일 경우 글로벌 시장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달러는 약세를 보일 것이다. 글로벌 유동성이 줄어들면서 전 세계 금리가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일부 국가는 중국 위안화 기반의 비(非)달러 결제 시스템을 검토 중이다.
탈달러 초기 신호로 봐야 하나.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해 전 세계 여러 정부와 중앙은행이 달러 대체 수단을 탐색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 인민은행과 사우디아라비아 중앙은행(SAMA)이 모두 참여하는 ‘엠브리지(mBridge)’2)프로젝트를 통해 자국의 원유 수출 대금을 중국 위안화로 결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 같은 흐름은 글로벌한 추세를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아직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결제가 이뤄진 건 아니다. 단, 러시아는 미국 금융망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에서 배제되는 등 서방의 제재로 인해 위안화를 활용한다.”
탈달러 현상은 단기적인 상징적 조짐일까, 아니면실제로 이어질까.
“관건은 트럼프가 연준 독립성을 침해하고, 추가 관세를 예고하며, 해외 중앙은행이 보유한 미국 국채에 세금을 부과하는 식의 혼란스러운 정책을 지속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그런 정책이 이어진다면, 세계 각국은 달러 대체 통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탐색할 것이다.”
미·중 무역 경쟁이 글로벌 통화 질서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중국은 자국의 대외 결제에서 달러 의존도를 줄이려고 한다. 러시아를 지지한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2차 제재를 받을 가능성, 대만 문제로 미·중 충돌이 심화하는 상황, 무역 전쟁으로 미국 금융시장에서 배제되는 시나리오 등에 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중국은 자체 결제 시스템인 ‘위안화국 제결제시스템(CIPS·Cross-Border Interbank Payments System)’3)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타국 은행도 위안화 결제를 더 매력적으로 느끼도록 유도하고 있다.”
위안화나 다른 통화가 향후 10년 내 현실적으로 달러를 대체할 수 있을까.
“‘위안화가 달러와 경쟁하기 어려운 가장 큰 장애물은 그 격차 자체가 크다는 데 있다. 현재 위안화는 글로벌 외환보유액의 3%를 차지하는 반면, 달러는 58%다. 외환 거래 비중은 위안화 7%, 달러 90%에 달한다. 스위프트 결제 비중도 위안화는 4%에 불과한 반면, 달러는 48%를 차지한다. 설령 위안화 거래규모가 두 자릿수 성장률을 유지하더라도, 달러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앞으로 국제통화 체제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나.
“미국 정책이 정상화한다면, 달러 지배력은 점진적으로 약화할 것이며, 유로화·위안화, 기타 소규모 개방경제 통화(예를 들어 원화) 비중이 조금씩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 혼란이 지속한다면, 그 변화는 훨씬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용어설명
- 1외환보유액
중앙은행 및 외국 국립 은행 등에 예치된 외국 통화 예금이다. 정부 자산으로, 달러·유로화·엔화 등이 준비 통화로 사용된다.
- 2엠브리지(mBridge)
국가 간 자금 이체 시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중앙은행발행 디지털 화폐) 사용을 실험하는 플랫폼이다. 중국, 홍콩, 태국, 아랍에미리트(UAE) 4개국 중앙은행이 참여하고 있다.
- 3위안화국제결제시스템 (CIPS·Cross-Border Interbank Payments System)
인민은행이 개발한 자금 청산 결제 시스템. 위안화 국제무역 결제, 국제 자본 프로젝트 결제, 국제 금융기관 및 개인 송금 결제 업무 등을 포괄한다. 2015년 10월 정식 운영을 시작했다. 2024년 말 현재 전 세계 119개 국과 지역에서 직접 참가 기관은 168개, 간접 참여 기관은 1461개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