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의 세계 돋보기
최근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주요국 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반도체는 컴퓨터, 스마트폰, 자동차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전자 기기의 핵심 부품일 뿐만 아니라 최근 각광받고 있는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스마트 팩토리1) 등 차세대 기술 구현에 필수 불가결한 존재다. 나아가 반도체는 의료 기기, 전략 무기 운용에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은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구조
미국은 부가가치가 큰 반도체 디자인 분야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반도체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을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라고 하는데, 최근 AI 연산용 그래픽처리장치(GPU)로 각광받는 기업 엔비디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반도체 제조공정의 총부가가치를 100이라고 했을 때, 그중 50은 반도체 디자인(팹리스)에서, 24는 전공정(웨이퍼 제조)에서, 6은 후공정(조립⋅테스트⋅패키징)에서 발생한다. 그 외 20은 반도체 장비와 소재를 만드는 공정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다. 아시아 지역은 반도체 전공정 분야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전 세계 반도체 전공정의 20%가 대만에서, 19%가 한국에서 이뤄진다. 중국(16%)과 일본(17%) 같은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도 큰 편이다. 미국의 전공정 비중은 13%, EU는 8%에 불과해 실질적인 반도체 제조 공정은 대부분 아시아 지역에 집중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첨단 반도체 전공정 분야에서는 한국과 대만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반도체는 트랜지스터의 선폭을 의미하는 ‘노드’가 미세할수록 제조하는데 높은 기술력을 요구하는데, 현재 전 세계에서 3nm(나노미터) 이하의 반도체를 제조할 수 있는 국가는 한국과 대만뿐이다. 최근 AI 기술 확산으로 높은 연산력을 요구하는 칩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첨단 노드 반도체를 제조하는 능력은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후공정은 상대적으로 요구되는 기술력 수준이 낮고, 노동집약적산업이기 때문에 인건비 및 공장 유지비가 저렴한 중국에 후공정 시설이 많이 분포해 있다. 전 세계 후공정 시설의 22%가 중국에 있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은 중국 기업이 아닌 외국 기업이다. 글로벌 후공정 기업이 중국에 공장을 두고 아웃소싱하고 있는 것이다. 대만에도 후공정 기업이 많이 있다. 이는 대만에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업체인 TSMC가 있기 때문이다.
전공정을 마친 반도체가 바로 후공정 단계에 진입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공장을 짓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유럽은 반도체 장비와 지식재산권(IP)에 강점이 있다. 반도체 공정이 복잡한 만큼 반도체 장비도 종류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비를 하나 꼽으라면,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빛을 쏴 미세한 회로를 새기는 데 사용하는 노광장비다. 노광장비 수준이 높을수록 미세한 회로를 반도체에 정밀하게 새길 수 있는데, 현재 7nm 이하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선 극자외선(EUV) 노광장비2)가 필요하다. 이러한 노광장비를 생산할 수 있는 업체는 네덜란드의 ASML뿐이다. 요약하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은 미국과 유럽에서 반도체 제조를 위한 디자인·장비⋅IP 등을 제공하고, 아시아 지역에서 실질적인 반도체 생산이 이뤄진 후 전 세계로 판매되는 구조로 돼 있다. 첨단반도체 영역에서는 특히 한국⋅대만⋅네덜란드 역할이 대체 불가능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반도체 생산 역량 낮아진 미국과 유럽
미국은 1990년대에 글로벌 반도체 생산의 37%를 차지하는 제조 강국이었다. 하지만 부가가치가 높은 디자인 영역에 집중하면서 지금은 글로벌 반도체 생산 비중이 13% 수준으로 하락했다. 반도체 제조는 상대적으로 공장 설립 비용과 인건비가 저렴한 아시아 국가가 담당하는 방식으로 분업화를 해 왔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물류망 마비 사태를 경험하면서 지역별로 분화된 반도체 공급망 구조의 리스크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특히 반도체 디자인⋅IP⋅장비 등은 일시적인 공급 차질이 발생하더라도 장기간 재사용이 가능하지만, 반도체 완성품의 공급이 끊기면 전자 기기, 의료 장비, 전략 무기 등 핵심 산업 생산이 지연·중단되는 등 즉각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반도체 제조 시설을 자국 내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미국은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의 13%를 차지하는데 수요 비중은 25%로, 두 배 가까이 높다. 유럽은 그 격차가 더욱 심하다. 유럽은 글로벌 반도체 생산의 8%를 차지하는 반면, 수요는 20%에 달한다. 만약 전쟁, 자연재해, 질병, 수출 통제 등 공급망 마비를 야기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유럽 내 반도체 생산만으로는 수요를 모두 충당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 반도체 제조 공정
자국 반도체 제조 역량 확대 나선 美
미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은 미국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지원 정책 수립과 외국 기업을 미국 내에 유치하기 위한 인센티브 제공, 대중국 견제 강화를 위한 각종 통제 조치 시행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이뤄져 있다. 단기적으로는 한국, 대만 등 반도체 제조 강국과 협력 관계를 통해 미국 내 제조 역량을 확대하는 한편, 중장기적으로는 미국 기업의 자체 경쟁력 강화를 통해 첨단 반도체 제조 능력을 키워내는 것이 미국의 목표다.2022년 제정한 ‘반도체 칩과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3)’이 미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대표적인 정책이다. 527억달러(약 77조6850억원)의 지원금을 통해 반도체 연구개발(R&D)·제조·인력 양성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반도체 시설·장비 투자에 대해 25%의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것이 이 법의 기본 골자다. 지원금과 세액공제는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외국 기업도 신청할 수 있다. 최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미국에 투자를 발표한 것도 이러한 인센티브가 지급되는 데 따른 것이다.
다만 미국의 보조금을 받게 될 경우 몇 가지 제약 사항이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국으로의 반도체 투자를 제한하는 조항이다. 일명 ‘가드레일(안전장치)’라고 불리는 이 조항에는 보조금을 받은 날로부터 10년간 중국에 반도체 설비의 확장과 기술협력을 제한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지급된 보조금을 전액 회수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보조금을 받는 시점을 기준으로, 중국 내 웨이퍼 생산 설비의 최대 5%까지만 추가 확장이 가능하며, 일정 공정 수준 이하의 레거시(구형 공정) 반도체 생산 설비는 10%까지 추가 확장이 허용된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 각각 공장을 두고 있다.
+부가가치 가장 큰 반도체 디자인
세 가지 목표 내건 EU 반도체법
EU도 2023년 9월 반도체법을 제정하면서 약 8%에 불과한 EU의 세계 반도체 생산 비중을 2030년 20%까지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법에는 총 430억유로(약 66조1000억원) 규모의 공공·민간 투자 계획이 담겨 있는데, 다음과 같은 세가지 중점 목표(pillar)가 있다. 첫 번째 목표는 ‘유럽 반도체 이니셔티브(Chips for Europe Initiative)’를 통해 반도체 설계, 제조, 인프라 등 유럽 반도체 산업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①EU 내에서 공동으로 사용 가능한 반도체 설계용 플랫폼 구축 ②정보 공유 및 교육을 위한 인프라 구축 ③첨단 반도체를 위한 파일럿 라인 도입 ④양자 칩 관련 기술 개발 위한 첨단 기술 역량 구축 등 다양한 계획을 제시했다. 두 번째 목표는 유럽 내 제조 능력 확보를 위해 국내외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초 제조 시설(first-of-a-kind)’이면서 EU의 반도체 공급망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경우, 신속 허가 절차를 통해 보조금 심사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금전적·행정적 혜택을 부여하고, 첨단 반도체 제조를 위한 파일럿 라인에 대해 우선적인 사용 권한을 제공해 기업 투자 유치를 촉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세 번째 목표는 반도체 공급망을 모니터링하고 수요 및 공급 부족을 예측하는 등 위기 대응을 위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필요한 경우 EU 집행위원회가 EU 역내 파운드리 업체에 위기 대상 품목을 우선 처리하도록 의무화하거나, 필요 품목을 공동 구매하는 중앙 구매 기관 역할을 수행하는 등 대응 조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美⋅EU 의존도 높은 한국⋯협력 지속해야
미국과 EU의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은 궁극적으로는 미국 위주의 공급망 재편을 위해 글로벌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고, 우방국과 경제협력 관계를 유지·강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나라는 대만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제조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고, 특히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수준으로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 EU 입장에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파트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미국과 EU와는 전략적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국 기업이 뛰어난 제조 기술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도체 제조를 위한 장비와 소재 분야에서는 해외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2022년 기준 반도체 제조용 장비인 이온 주입기의 미국 수입 비중은 90.2%였고, 노광장비의 네덜란드 수입 비중은 99.8%였다.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는 도금액(웨이퍼 표면에 쓰이는 얇은 금속층 재료)의 대미 수입 비중이 97.1%였다. 미국·유럽으로부터 공급 차질이 발생할 경우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반도체 생산에 제동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 EU와 협력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전제로, 각국에서 시행 중인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을 신중하게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반도체 칩과 과학법은 보조금 신청 시 초과 이익 환수, 기업 정보 제출, 대중국 반도체 투자 제한 등 까다로운 기준을 요구하므로, 한국 기업은 미국에서의 득실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또 유럽 내 새 반도체 생산 시설이 들어서면 우리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이 EU에 진출하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용어설명
- * 1) 스마트 팩토리
정보 통신 기술을 이용해 제품의 설계, 생산, 유통·판매 등 전 과정을 통합하고, 자동화와 디지털 정보화를 구현하는 지능형 공장.
- * 2)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극자외선을 사용해 반도체를 생산하는 장비로, 웨이퍼에 더 미세하게 패턴을 새길 수 있다. 이 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 공급하고 있다.
- * 3) 반도체 칩과 과학법 (CHIPS and Science Act)
미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기술적 우위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반도체 생태계 육성 법안으로, ‘미국 반도체 지원법’으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