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현장

“미국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1) 발표 직후 가장 먼저 미국과 접촉한 국가는 한국이었다.” 김성열 주미 대사관 상무관은 2022년 7월 27일(이 하 현지시각) 미국 정부가 IRA 초안을 공개한 직후부터 숨 가쁜 시간을 보냈다. 미국 현지 자문 로펌과 법안 내용을 분석하고, 우리 기업과 소통하며 IRA가 한국에 미칠 영향을 세밀하게 검토한 것 이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와 만나 한국 정부 입장을 설명했을 때는 USTR 측조차 법안의 상세 내용을 모를 정도였다. 김 상무관은 “한국 정부의 발 빠른 대응 덕분에 미국 정부가 우리 입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며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약진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IRA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기울인 각고의 노력과 성과를 김 상무관에게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2022년 IRA 발표 이후 한국 기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2022년 7월 말 IRA가 최초로 공개되고, 8월 중순 최종 통과까지 불과 3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속했다. 법안이 상원을 통과한 직후인 2022년 8월 초, 미국 정부를 어느 나라보다 가장 먼저 접촉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당시 USTR 인근 카페 야외 테이블에서 USTR 대표 보와 만났다. 한국 정부가 IRA의 국제 통상 규범 위배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는 점과 한국 기업의 대미(對美) 투자에 미칠 영향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USTR 측은 IRA의 구체적인 내용조 차도 모르고 있었다. IRA 통과 직후 유럽연합(EU)과 일본 등 주요국 주미 외교단 측과도 IRA 관련 논의 및 대응 공조를 위해 접촉했으나 이들 역시 IRA 통과 배경 뿐 아니라 법안 내용조차 상세히 파악이 안돼 있었다.”
한국이 이렇게 빨리 대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미 상무관실에서 IRA 공개 직후부터 미국 현지 자문 로펌과 법안 내용을 분석했다. 현지 우리 업계와도 긴밀히 소통하면서 한국에 미칠 영향을 세밀하게 검토했다. 덕분에 미국 정부와 협의에 신속하게 임할 수 있었고, USTR도 회동 이후 우리 입장을 경청하고 이를 미국 관계 부처 등에 전달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IRA 통과 후 각종 하위 행정 지침이 최종 발표되기까지 한미 정부 간 협의가 1년 이상 이뤄졌는데, 그 시초가 됐던 USTR 대표보와 뜨거운 만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국의 발 빠른 대응에 다른 나라도 놀랐을 것 같다.
“그렇다. 2022년 하반기에 IRA 관련 동향 공유를 위한 미국 수입자동차협회 비공개회의에 참석했는데, 한국, 일본, 유럽 자동차 업계와 주요국 외교단은 한국 정부가 IRA 통과 이후 빠르게 대응한 노하우, 최근 미국과 협상 동향 등을 중점적으로 물어봤다. 특히 일본과 EU 측에선 ‘한국 정부가 발 빠르게 대응하며 얻은 정보 공유에 감사하고 앞으로 선봉장 역할도 계속 기대한다’고 전했다. 한국 특유의 빠르게 일하는 방식이 급박한 순간에 더욱 빛을 발했다고 본다.”
미국 현지 당국의 반응은 어땠나.
“IRA가 통과될 무렵, 초창기 미국 정부와 접촉했을 때 그들도 법안 논의 동향이나 관련 내용을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의회에서 제정되는 법안이므로 법에 따라 행정 지침을 마련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이해관계자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했다. 또 태양광, 풍력, 배터리 등 한국 기업의 미국 내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오히려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정부는 IRA가 이상과 현실 간 괴리가 있다는 측면과 기업의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선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는 점 등 현장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설명했다. 이후 미국 당국은 협의 과정에서 한국 입장을 점차 이해하기 시작했다. 미국 내 전기차, 배터리 공급 망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 기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2022년 9월 7일 한미 관계 부처 간 IRA 정례 협의 채널을 구성하기로 공식 합의했다. 그 이면엔 미국 정부가 협의에 나서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뤄진 치열한 물밑 논의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어떤 성과를 거뒀나.
“한국 전기차는 국내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 전기차 보조금의 전제인 북미산 조립 요건을 최대한 덜 엄격하게 적용받아야 했다. 특히 북미산 조립 요건이 적용되지 않는 IRA의 리스∙렌트용 전기차 조항이 최종 행정 지침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는게 필요했다. 미국 의회 일각에선 리스∙렌트용 전기차에 대해서도 엄격한 요건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우리 정부 노력으로 최종 행정 지침에서 리스∙렌트용 전기차는 까다로운 요건 적용이 면제됐다. 이후 우리 전기차 업계가 미국 내 판매 전략을 리스∙렌트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했고,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약진할 수 있었다. 2024년 상반기 현대차·기아의 미국 전기차 시장점유율은 약 10%로, 테슬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배터리 업계에서도 성과가 많다고.
“배터리 부품, 핵심 광물 요건에서도 한국 입장이 반영된 최종 지침이 발표되면서 흑연 등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핵심 광물에 대해 우리 업계가 공급망을 다변화할 수 있는 대응 시간을 확보하게 됐다. 미국 에너지부는 IRA 전기차 보조금 대상 전기차 모델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해 공개하고 있는데, 2024년 4월 기준 34개 보조금 대상 모델 중 대다수인 27개 모델이 한국 기업의 배터리를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IRA가 우리 배터리 기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최소화됐다고 본다.”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미 행정부의 경제·통상정책 기조가 달라질 수 있다. 어떻게 대비하고 있나.
“미국 조야의 인사를 다양하게 만나고 있다. 미국의 산업 재건 과정에서 한국 기업 역할을 설명하고 이들 기업의 투자를 지원하는 기존 정책과 제도의 장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설득하고 있다. 또한 우리 업계의 투자 및 경영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신규 보호무역 조치가 최소화 될 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 주미 상무관실 활동의 최우선 순위는 차기 미국 정부의 정책 변화를 분석·전망하고 관련 정책을 이끌어 갈 핵심 인사를 파악하는 것이다. 대선 이후 미국 정치 지형 및 정책 변화를 조언해 줄 현지 인사를 다양하게 만나 한미 동맹과 특히 경제∙산업 협력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할 계획이다. 이를 토대로 우리 정부가 미국 대선 이후 정책 불확실성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도록 현지 활동을 계속해 나가려고 한다.”
용어설명
- * 인플레이션 감축법(IRA)(1)
미국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완화를 위해 제정한 법. 기후 변화 대응, 보건 분야 복지 개선, 기업 과세 개편 등에 정부 자금을 투입해 미국의 재정 적자 해소 및 친환경 경제로의 전환을 목표로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특히 기후 변화 대응과 관련해 미국 내 전기차 등의 공급망을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을 받으려면 배터리용 핵심 광물을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조달해야 하고, 배터리 부품을 북미에서 일정 수준 이상 제작·조립하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