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더 특별한 통상

“한국의 뷰티 산업은 중소기업의 존재감이 강하다. 이는 제조 업자와 유통 업자를 분리하는 ‘책임판매업자’ 개념을 정부가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판매업자는 제조 시설이 없어도 시장에 참여할 수 있고, 제조업자는 판로 없이도 책임판매업자를 통해 제품을 판매할 수 있다.”
장준기 대한화장품협회 전무는 ‘통상’과 인터뷰에서 “한국의 화장품 산업구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모델로도 볼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한화장품협회는 1945년 ‘조선화장품협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국내 최대의 화장품 관련 단체다. 내년이면 설립 80주년을 맞는다.
화장품 산업의 발전을 위한 시장조사, 법 제도 연구, 정책 건의, 컨설팅 등 사업을 하고 있다. 크고 작은 화장품 기업, 수입 회사, 원료 회사, 화장품 용기 제조 회사 등을 비롯해 총 272개 회원사를 두고 있고,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협회장을 맡고 있다. 대한화장품협회의 장준기 전무를 8월 23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한국 뷰티 산업의 역사를 소개해 달라.
“한국전쟁 직후 산업화 초기엔 국내 기업들이 제조 인프라를 조금씩 갖춰가며 국내 위주로 성장해 오던 시절이었다. 이후 1987년도에 수입이 완전 자유화되면서 질 좋은 수입 화장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국내 산업이 어려워지자, 기업들은 해외 기업과 기술제휴를 활발히 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산 화장품이 주목받게 된 계기는 2000년대 초반 ‘한류(韓流)’ 열풍, 본격적으로 인기가 확산한 건 2010년대였다.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한류 스타가 쓰는 한국산 화장품이 관심을 많이 받았고, 한국 제품 전반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다. 중국 ‘보따리상’이 한국산이라면 보지도 않고 사갈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2012년까지는 화장품 수입이 수출을 앞섰는데, 2013년엔 수출이 수입과 대등할 정도로 늘었고 이듬해부터는 수출이 수입을 역전했다.
한류가 유행하던 시기, 외국과는 다른 한국만의 차별화된 제품도 개발되기 시작했다. 쿠션 파운데이션, 비비크림 등이 있다. 쿠션 파운데이션은 우리나라가 최초로 개발한 제품으로, 전 세계로 확산됐다. 비비크림의 경우 원래는 독일에서 피부과 시술 후 피부를 보호하는 용도로 개발한 제품인데, 우리 기업이 기능을 바꿔 메이크업 용도로 내놔 세계적 인기를 누렸다. 마스크 팩도 과거에는 판촉으로만 제공하던 제품이었는데 여러 기능을 넣어 고급화했다. 특이한 소재를 넣은 마유 크림, 달팽이 크림 등도 국내에서 개발돼 인기 수출품이 됐다. 한국 문화의 인기와 우리 기업의 노력, 차별화된 제품력이 더해져 지금의 K뷰티 산업을 일궜다.”

중국을 넘어 미국에서도 수출 실적을 올리고 있다. 그 배경은 무엇인가.
“먼저 중국 수출이 힘들어졌다. 중국이 한국의 뛰어난 인재를 많이 스카우트해서 빠르게 품질을 올리고 시장을 키우고 있다. 가격 경쟁력도 한국보다 앞서다 보니, 중국 시장에서 내수(토종) 브랜드가 크게 성장했다. 그런 와중에 2007년 한한령(限韓令)이 내려졌고 화장품 소비자도 ‘애국 소비’를 시작했다.
또 ‘위생 감독 관리 조례’라는 화장품법을 개정해 규제도 강해졌다. 수입품 인허가 비용이 큰 폭으로 늘어, 웬만큼 팔아서는 이익을 내기가 쉽지 않은 시장 환경이 됐다. 한때 수출 총액의 67%(홍콩 포함)를 차지하던 중국 시장이 어려워지니 기업 입장에서는 다각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한 가지 측면에선 2010년대후반 들어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 K팝 그룹방탄소년단(BTS) 등이 전 세계적 인기를 얻으며 아시아에서 시작된 한류가 ‘K컬처’라는 이름으로 미국과 유럽으로도 확산하게 됐다. 이 때문에 미국과 유럽에서 우리 제품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고, 일본을 비롯해 미국, 유럽으로 수출이 늘게 됐다.”

‘K뷰티’만의 강점은 무엇인가.
“우리만의 차별화된 제품을 개발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외국산 원료로 제품을 만들어 외국에 나가려고 했다. 외국인 시각에선 그들 제품과 같은 원료로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과 같으니 ‘짝퉁’처럼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2000년도부터는 한방 재료처럼 우리만의 소재를 개발해 다른 나라에는 없는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해외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일본에서는 현재 수입 화장품 1위가 한국 화장품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도 작년에 프랑스의 뒤를 잇는 2위를 기록했다. 특히 한국 소비자는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우리 기업이 이런 소비자에게 대응하다 보니 우리나라만의 소재, 제형을 활용한, 소비자 수요에 맞는 제품을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개발할 수 있게 됐다. 외국은 제품 하나 개발하는 데 3년 걸린다고 하는데, 우리는 1년 이내, 빠르면 6개월 이내에도 개발이 가능하다. 제품 개발 과정 자체가 외국과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그간 업계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 왔나.
“기업도 해외 진출 노력을 많이 했다. 최근에 일본에 다녀오고 느낀 것이, 일본의 중소 화장품 기업은 해외 진출 수요가 크지 않더라. 국내 시장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중소기업이 많아 보였다. 일본과 달리 우리는 내수 시장이 작기 때문에 해외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도 잘 팔릴 수 있도록 대기업·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해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품질 개선과 브랜딩에 힘썼고, 지금은 내수보다 수출액이 많다. 수출 규모로는 프랑스, 미국, 독일에 이어 세계 4위다.뷰티 산업 성장에 정책적 도움도 컸나.
“산업 성장과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 정부가 화장품 산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유럽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었다. 국내 업계에서는 유럽의 대기업 화장품이 수입돼 국내 시장에서 성장하던 시기에 관세까지 철폐되면 유럽 제품이 가격 경쟁력을 가지고 시장을 잠식할 거라는 우려가 컸다. 그래서 정부가 지원 방안을 마련한 것이 화장품 산업 지원의 시작이었다. 이를 계기로 2010~2018년 총 709억원에 달하는 제품 연구개발(R&D) 비용을 지원했다.
해외 진출 시 현지 인허가 정보, 시장 정보 수집 등을 정부가 도왔고 해외 전시회 나갈 때 각종 비용을 지원했다. 직접 지원 외에 정책 지원도 있었다. 화장품은 약사법으로 관리되다 2000년도에 화장품법이 별도로 제정돼 화장품 특성에 맞는 법 운용이 가능해졌다. 2011년에는 법이 개정되면서 화장품 원료에 ‘네거티브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전엔 화장품을 만들 때 정부가 정한 원료만 쓸 수 있고 새 원료를 쓰려면 일일이 허가 받아야 했다. 네거티브 시스템 도입 후엔 사용하면 안 되는 원료만 정해두고 그 외에는 전부 허용했다. 대신에 안전성을 확보하는 선에서 사용하고,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관여하는 식이다. 이를 기점으로 소재 개발이 활발해지고 제품이 다양해졌다.
화장품을 직접 제조하지 않더라도 판매할 수 있는 ‘제조판매업’ 개념도 그 무렵 도입됐다. 그 덕에 제조 시설이 없는 브랜드 회사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2020년대부터는 맞춤형 화장품을 판매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됐다.”

정부 지원 정책도 발전 단계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 같은데.
“산업 초기에는 정부 중심 관리가 많았다. 정부가 기준을 정해놓고 기업이 그 안에서 생산 활동을 하는 것이다. 산업 초기에는 이런 관리가 효과적이지만, 산업이 발달할수록 기업이 정부의 틀 안에 갇히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지금은 정부 중심 관리에서 민간 자율 관리로 점차 전환되고 있다. 협회와 업계가 민관 협의체를 만들어 규제 정책이 산업 발전과 균형을 이루도록 매년 논의하고 있다.”인디 브랜드 제품이 대기업 제품 못지않게 인기를 누린다는 점이 뷰티 산업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를 가능케 한 구조적인 배경은 무엇인가.
“최근 대두된 배경으로는 이커머스(전자상거래)의 발전에 있다. 과거엔 오프라인 시장이 훨씬 컸다. 오프라인 시장은 중소기업이 접근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이커머스는 플랫폼도 다양하고, 제품 품질만 좋다면 직접 소비자와 커뮤니케이션하며 판매할 수 있다. 해외 진출도 마찬가지다. 이커머스를 통해 좀 더 쉽게 판로를 해외로 넓힐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 소비재 수출 품목 중 압도적인 1위가 화장품이라고 한다. 제조자개발생산(ODM)이 활발하다는 정책적인 배경도 있다. 공장이 없고 자본이 없어도 산업에 접근하기 쉬운 형태의 제도가 있다. 꼭 제조까지 하지 않더라도 상품을 기획해 팔 수 있으니, 중소기업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이 화장품 산업에 진출할 수 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이다. 해외는 이렇게까지 ODM이 활발하지 않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으로도 볼 수 있겠다.
“그렇다. 제품을 제조하는 ODM 회사는 대기업, 발주하는 인디 브랜드는 중소기업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한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브랜드 회사 입장에서는 R&D 시설이나 제조 시설 없이도 원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으니까 좋은 거고, 제조사도 판로는 없어도 R&D와 제조만 열심히 하면 팔아주는 사람 있으니까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