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의 세계 돋보기
이스라엘과 충돌 최소화 의지…대이란 제재 완화 물꼬 트일까
승리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여겨졌던 이란의 유일한 개혁파 후보 마수드 페제시키안(Masoud Pezeshkian)이 예상을 뒤엎고 이란의 제14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통령 선거에서 큰 이변이 발생하면서 국제사회가 이란 정세와 경제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전임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불의의 헬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1년 이상 이르게 치러진 대선이라,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은 온건파나 개혁파나 마찬가지였다. 대선 출마할 후보조차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나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고 결선에서 경쟁자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페제시키안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제재 완화’ ‘경제 부흥’…변화 원했던 표심이 페제시키안 당선 불렀다
페제시키안이 일으킨 이변은 이란 국민이 그만큼 변화를 원했음을 의미한다. 미국과 유럽의 제재에 맞선 저항 경제의 효과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는 보수 정파의 진단과 달리, 이란 국민은 제재를 완화하여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절망감을 이번 대선에서 드러냈다. 누가 되더라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체념 어린 반감으로 대선 투표율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여기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했던 보수 표심마저 페제시키안을 향했다. 페제시키안 당선은 이란 국민에게 먹고사는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국민 경제보다는 히잡 단속에 진을 빼고, 헤즈볼라(레바논 무장 세력)나 하마스(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등 해외 저항 세력 지원에 바쁜 보수 정파의 정책에 의미 있는 반기를 든 것이다.
민심 등에 업고 시작된 ‘페제시키안의 시간’
2015년 7월 JCPOA1)(이란 핵 합의·포괄적 공동행동 계획)가 타결됐을 때 미국 1달러는 이란 돈으로 3만2370리알이었다. 그런데 8월 26일(이하 현지시각) 기준, 1달러는 이란 돈으로 59만5000리알이다. 무려 18.4배나 이란 돈의 가치가 하락한 것이다. 환율이 이러한데 경제가 좋을 리 없다. 페제시키안은 이러한 민심을 제대로 읽고 대미·대유럽 외교 관계를 개선해 제재 완화로 경제 활로를 찾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낮은 투표율에도 보수파가 당선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최고지도자 세예드 알리 호세이니 하메네이도, 보수 정파도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최고지도자라도 민심을 등에 업은 대통령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하메네이는 정계에 새로운 대통령과 협력할 것을 요구했고, 보수파가 압도하고 있는 국회는 페제시키안이 선택한 장관을 단 한 명도 부결하지 않고 승인했다. 바야흐로 이제 페제시키안의 시간이 시작됐다.
수도 한복판서 하마스 수장 암살…혼돈 속 취임식
그러나 새로운 대통령 앞에 놓인 길은 평탄하지 않다. 취임식부터 지정학적 혼돈의 도가니가 시작되었다. 이란은 반이스라엘 저항 세력인 하마스를 지원한다. 그런데 하마스 지도자(정치국장) 이스마일 하니예가 7월 30일 페제시키안 대통령 취임 축하 손님으로 이란에 왔다가 혁명수비대의 안가(安家)에서 암살당했다. 이란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다. 이란이 지원하는 세력에는 적어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이란, 그것도 수도 테헤란의 안가에서 친(親)이란 인사가 목숨을 잃었으니 말이다.
이란은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했다고 했으나 이스라엘과 미국 언론은 외부 세력에 매수된 혁명수비대 대원 두 명이 하니예 방에 폭탄을 설치해 하니예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이스라엘 모사드(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소행이라고 규정하며 보복을 천명했는데, 이스라엘은 개입 여부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는 이스라엘이 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미 4월 1일 이스라엘은 주시리아 이란 영사관을 폭격해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포함해 13명의 이란인을 살해했다. 이에 이란은 4월 13일 역사상 최초로 이스라엘 본토를 향해 보복 공습을 감행했고, 이에 질세라 이스라엘은 4월 19일 다시 이란 본토에 미사일을 쏘며 반격했다. 그동안 전략적으로 인내하며 묵묵히 공세를 참아오던 이란이 처음으로 새로운 대응 방식을 선택했는데, 이번 하니예의 암살에도 이란이 직접 이스라엘에 반격할지는 국제사회 초미의 관심사다.
확전 원하는 이스라엘과 피하려는 이란
만일 페제시키안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이란은 이스라엘에 좀 더 강경하게 맞대응하는 카드를 내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란에 가해지는 제재를 풀기 위해 미국 및 유럽과 유연한 외교 관계를 구축하려는 페제시키안은 직접 군사적 대응을 피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휴전을 조건으로 이스라엘의 하니예 암살에 대한 대응 수위를 낮출 것을 최고지도자에게 건의했다는 후문이다. 안타깝게도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휴전은 성사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스라엘군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는 하마스와 달리,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이집트의 국경 지대인 필라델피 통로, 가자지구를 남북으로 가르는 네짜림 통로에 이스라엘군을 주둔시켜 하마스 재건을 막겠다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휴전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이란은 하니예의 죽음과 관련한 보복을 실행해야 하나, 페제시키안은 지금까지는 조심스러운 행보를 취하고 있다. 8월 26일 페제시키안의 외교 장관 압바스 아락치는 이스라엘이 테헤란에서 벌인 테러 공격에 대해 “이란은 단호하지만, 잘 계산된 보복을 할 것”이라며 “확전(escalation)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이스라엘과 달리 확전을 추구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예멘의 후티(예멘 반군)가 확전을 도모하지 않도록 둘 사이를 조율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사실 확전은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네타냐후 정부는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 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사실상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보고 있다.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이라크의 이슬람 저항군을 후원해 팔레스타인 독립을 지원하는 이란을 이참에 타격해서 화근을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특히 이란의 핵시설을 반드시 타격해 무용지물로 만들겠다는 목표 의식이 뚜렷하다. 그런데 이스라엘 홀로 이를 수행하기는 어렵기에, 이란을 자극해 전쟁을 확장하고 미국의 도움으로 이란 핵시설을 파괴하겠다는 의도다. 이란은 이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확전을 피하고 있다.
미국, ‘확전 반대’ 같은 뜻⋯제재 완화 대화 물꼬 트일까
미국 역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확전은 절대로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전선(戰線)을 또 하나 더 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미국은 페제시키안에게 이스라엘에 보복하면 모든 대화 통로를 끊겠다는 경고까지 한 상황이다. 미국이나 이란이나 모두 확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이란과 미국의 대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다. 이란이 페제시키안의 대외 관계 유화정책에 방점을 두면서 확전 유혹을 견디고, 11월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카멀라 해리스 후보가 승리한다면, 이란과 미국 간 극적인 대화의 물꼬는 생각보다 더 쉽게 트일 가능성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JCPOA를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바로 정상화한다고 했다. 그러나 바이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란에는 희망 고문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제는 JCPOA라는 해묵은 숙제를 해리스와 페제시키안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페제시키안의 의지는 굳다.
“표현과 비판, 대화의 자유 존중이 우리의 계획 중 하나입니다. 정부는 국민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염소의 코만큼이나 쓸모없을 뿐입니다.”
페제시키안의 말이다. 페제시키안은 보수 정파가 감히 비난하기 어렵게 시아파 종교 지도자 이맘알리의 표현을 인용하면서 국민의 뜻을 헤아린다. 이렇게 개혁적인 대통령을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다. 이란과 미국이 두 번은 없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잡길 바라는 마음이다.
용어설명
- * 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1)
P5 + 1(미국·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독일)과 이란이 2015년 7월 14일 이란의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최종 합의한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 양측은 제재 해제 순서, 군사시설 사찰 여부, 대이란 무기 금수 해제 등에 대해 17일간의 협상 끝에 합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