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현장
한국이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공급망 협정 이행 기구인 ‘위기대응네트워크(CRN·Crisis Response Network)’의 의장국으로 선출됐다. CRN 의장국은 공급망1) 교란 사태 발생 시 미국, 한국, 호주, 브루나이, 피지,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 14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긴급 회의를 주재한다. 의장국은 회의에서 정보 공유를 주도하고, 공급망 위기 해소 방안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IPEF 내 리더십이 강화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IPEF 14개 회원국은 7월 24일 화상으로 진행된 회의에서 공급망 CRN 의장국과 부의장국 선출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 결과, 의장국에 한국이, 부의장국에 일본이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CRN은 IPEF에서 최초로 도입된 개념이다. 위기 시 비상 회의를 소집해 회원국과 공조 방안을 논의한다. 필요시 비상 회의는 정상급이나 장관급으로 격상될 수 있다. 평시에도 교란 대비 전략을 수립하고, 모의 훈련을 진행해 위기 대응 능력을 확보한다.
CRN, IPEF 내 ‘위기 대응 수뇌부’ 역할
CRN은 IPEF 협정문 제7조와 제12조에 규정된 이행 기구다. 공급망 교란 공동 대응을 위해 긴급 지원을 조율하고, 위기 대응 역량을 제고하는 역할을 한다.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관계자는 “CRN은 공급망 교란 관련 정보를 전파하고 지원을 조율하기 위한 비상 연락 채널 역할을 한다”면서 “공급망교란 대응 전략을 준비하고 도상 훈련과 스트레스 테스트도 실시한다”고 말했다. 이어 “공급망 교란 관련 정책과 절차를 평가하고 회원국의 대응 협력을 촉진하는 기능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CRN에서 의장은 연례·긴급 회의를 주재하고 공급망 교란이 발생한 회원국에 대한 지원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IPEF 내에서 공급망 관련 이슈가 발생했을 때 의장국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의미다. 산업부 관계자는 “의장국은 위기 발생 시 피해국이 필요한 지원 내역을 검토하고 타 회원국 지원 가능 사항을 점검하게 된다”면서 “대체 운송 경로부터 과도한 가격 상승 방지 방안 모색까지 전방위적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정인교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공급망 위기 발생 시, IPEF 회원국 14국이 공동 대응하는 교두보가 마련됐다”면서 “회원국의 자원을 신속하게 동원하는 데 용이한 시스템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본부장은 이어 “한국의 공급망 위기 대응 경험과 역량에 대해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 만큼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외교 공간이 확대됐다”고 덧붙였다.
CRN 진행 프로세스는
CRN 긴급 회의는 IPEF 회원국 중 한 나라가 공급망 위기가 발생해 회의 소집을 요청하면 개최된다. 공급망 위기가 발생한 나라에선 공급망 위기가 발생한 원인과 예상되는 기간, 교란으로 인한 영향 그리고 필요한 지원 내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CRN 의장국은 비상 대응 요청이 들어온 후 15일 내 비상 회의를 소집해야 한다. 비상 회의에서는 회원국끼리 모여 비즈니스 매칭과 대체 운송 경로 모색, 공급난 발생 품목의 과도한 가격 상승 방지 방안을 모색한다. 수출 통관을 지원하고 추가적인 공급망 발생을 막기 위해 매점매석을 억제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예를 들어, 2021년 국내에서 발생한 요소수 대란이 A국에서 발생했다고 치자. A국은 IPEF 회원국에 자국이 보유한 요소의 양과 요소 중단이 공급됐을 때 벌어질 물류 대란 등의 정보를 의장국에 공유하고, 비상 회의 소집을 요청하게 된다. 의장국인 한국은 A국의 상황을 회원국과 공유하고, 요소수 비축량이 충분한 나라와 연결해 급한 불을 끌 수 있도록 돕는다. 대체 공급지 확보와 함께, 향후 발생할 요소 대란을 대비한다는 취지로 회원국이 요소수 사재기를 하려는 것도 제동을 걸어 공급망 위기 시 ‘가수요’가 발생하는 것도 사전에 막을 수 있게 된다.
IPEF 공급망 위기 대응 네트워크의 기대 효과
공급망 안정이 중요한 ‘경제 안보’ 품목 중 IPEF 회원국끼리 상호 지원할 수 있는 품목으로는 뭐가 있을까. 산업연구원의 양주영 부연구위원 등이 지난 4월 발표한 ‘한국의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경제 안보 핵심 품목 선정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광물성 생산품에서는 호주, 미국, 인도네시아, 인도 등이 일부 품목에 대해서 협력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천연 황산바륨’은 인도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 중이지만, 한국으로의 수출량은 많지 않은 상황이다. 철광석은 호주, 니켈광은 필리핀과 미국이 상당량을 보유하고 있다. 호주는 철광석 외에도 알루미늄과 아연, 몰리브덴, 지르코늄 등 원광도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는 요소는 IPEF 회원국 중에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경쟁 우위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산비료는 베트남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한국으로 수출은 적은 편이다. 우리가 미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품목으로는 산화아연, 주석산염, 페로망간, 아연 등이 거론된다. 일본에는 비료와 1차 금속 합금 제품, 이차전지 품목에서 한국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원 부국인 호주에는 한국이 개인 보호 장비와 함께 반도체 제조 장비, 메모리 반도체 공급을 지원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이차전지 음극재 핵심 소재인 천연흑연을 비롯해 천연마그네슘, 형석(플루오린화칼슘 함유), 텅스텐 등은 IPEF 역내에서 경쟁력을 보유한 국가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수입의존도 높은 韓…공급난 대책 ‘필수’
자원이 부족하고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공급망 불안’은 상당한 리스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현재 한국은 에너지 3대 자원인 원유와 천연가스, 석탄을 각각 100.0%, 99.7%, 99.1%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에너지자원 공급이 불안해질 경우, 에너지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셈이다. 철광과 비철금속 등 주요 금속의 수입의존도도 99%를 상회한다. 핵심 금속 공급난이 발생하면 제조업 중심의 한국 경제가 멈추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특히 한국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반도체와 자동차, 이차전지, 철강은 다른 나라에서도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며 우리와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과거 일본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수출규제와 2022년 발생한 ‘와이어링 하네스(배선 뭉치)’부족, 중국의 요소와 흑연 수출제한 조치 등 공급망 불안 사태로 인한 산업·민생 위기를 실제로 겪기도 했다.
IPEF CRN은 이러한 위기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으로 거론된다. 정부는 CRN을 통한 위기 대응을 보다 더 신속하게 할 수 있도록 회원국별로 핵심 협력 분야와 품목을 선정하고 공급망 안정 협력을 위한 ‘공동 프로젝트팀’을 운영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핵심 협력국과 양자 공급망 파트너십 구축도 나선다. 핵심 협력국과 핫라인을 구축해교란 징후가 감지됐을 때 상호 정보를 공유하고 즉각적으로 공동 대응에 나서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IPEF 회원국인 일본·싱가포르와는 LNG(액화천연가스) 스와프를 추진하고 미국·베트남과는 희토류 공동 연구에 나설 예정이다.
산업부는 지난해 말 발표한 ‘산업 공급망 3050 전략’에서 185개 공급망 안정 품목을 선정하고, 이들의 특정국 의존도를 2022년 평균 70%에서 2030년 50% 이하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과정에서 IPEF 필라 2(공급망 협정)가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부는 우선 △요소 △반도체 희귀 가스(네온·크립톤·크세논) △반도체 소재(무수불산·형석) △이차전지 양극재 △이차전지 음극재(인조흑연·천연흑연) △희토 영구자석 △마그네슘 △몰리브덴 등 ‘8대 산업 공급망 선도 프로젝트’를 IPEF 필라2와 연계해 추진할 방침이다.
양주영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공급망 위기 대응과 관련해 한국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높은 대중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라며 “수입선 다변화와 함께 핵심 소재와 기술의 내재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수입선 다변화, 결국은 ‘비용’으로 귀착
공급망 위기는 자유무역 체계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원이나 재료를 공급받아 이를 2차 가공해 부가가치를 높여 수출하는 게 한국의 성장 공식이었다. 하지만 경제 안보를 앞세운 신통상 질서가 국제무역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공급선 다변화는 모든 국가의 과제가 됐다. 문제는 공급선 다변화가 비용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한 산업계 관계자는 “갑자기 공급 위기가 발생한 품목을 다른 나라에서 대체 수입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문제는 비용이다. 더 비싼 값에 자원 등을 수입해야 하고, 이는 단가 인상으로 이어져 수출 경쟁력을 약화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과 학계에서는 이러한 수입선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비용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양 부연구위원은 “공급망 안정화 기금 등 세부 지원 프로젝트를 품목별로 상이한 상황에 맞춰 포괄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면서 “수출 기업의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수출금융을 확대하고, 수출 바우처2)를 활용해 공급망 다각화 비용을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 PLUS POINT
미 대선 결과에 따른 IPEF 향방은?
IPEF는 중국발(發) 공급망 위기 대응을 위해 미국 주도로 2022년 5월 만들어진 다자 경제 협력체다. 참여국은 미국, 한국, 호주, 브루나이, 피지,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 14개국이다. 이들 참여국은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0%, 상품·서비스 교역액은 28%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2022년 12월 협상을 시작해 2023년 5월 타결된 IPEF 공급망 협정은 3월 24일 공식 발효됐다.
일각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하 트럼프)이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에 재선할 경우, 미국이 IPEF에서 탈퇴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트럼프가 IPEF 즉각 탈퇴를 공약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2023년 11월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IPEF 무역 협정을 ‘TPP 2’라고 지칭하면서 “다음 행정부 (취임) 첫날 바이든의 ‘TPP 2’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IPEF 무역 협정이 “첫 번째(TPP)보다 더 나쁘다”며 “미국 제조업을 공동화하고 일자리 감소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2017년 1월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선언한 바 있다.
정부에서도 미 대선 결과에 따라 글로벌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와 동시에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 견해도 있다.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은 7월 25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주재한 ‘제2차 글로벌 통상 전략 회의’에서 “하반기 미국 대선 등을 거치며 글로벌 리스크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면서“(대미 통상 리스크에) 정부와 업계가 원팀이 돼 불확실성을 완화하고, 대미 투자 기업 등 업계의 불안감 해소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용어설명
- * 1) 공급망
국제적으로 제품을 공급하기 위한 연결망.
* 2) 수출 바우처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시장조사, 브랜드 개발 등 사전 준비부터 해외 영업 지원, 홍보 등 시장 진출까지 수출 전 과정에 필요한 바우처를 지급, 기업이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수출 지원 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