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트렌드

혼밥 아니고 집밥의 시대

노경목 한국경제신문 차장 사진 한경DB

1인 가구의 증가로 ‘혼밥주(株)’가 뜬다고 호들갑을 떨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이 같은 현상을 바꿔놓고 있다. 이른바 집밥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식당 가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일상화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코로나19로 식당들이 문을 닫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확산되면서 집밥 수요가 어느 때보다 늘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식품기업뿐만 아니라 가전제품 기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자레인지나 냉장고 판매량이 증가하고 있는 것. 기업들의 실적이 대부분 악화된 올해 1분기에 식품기업들은 오히려 실적이 올라 눈길을 끌었다.

외출할 일 줄어들면서 집밥에 더 투자

동원F&B와 오리온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5%, 25.5% 늘어난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집에서 데우기만 하면 웬만한 식당에서 먹는 것 못지않은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가정간편식(HMR; Home Meal Replacement) 과 바로 먹을 수 있는 간편대용식 판매가 크게 늘어난 영향이다. 식품을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CJ더마켓’에서는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한 지난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HMR 제품 판매량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84% 늘어났다. 즉석밥인 햇반의 주문량도 평상시보다 2.5배 증가했다. 식품회사 관계자들은 “외출할 일이 줄어들면서 옷이나 화장품에 적게 지출하는 대신 집밥에는 더욱 신경을 쓰면서 상대적으로 질 좋은 HMR을 찾는 이들이 늘었다”라고 밝혔다. HMR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소하던 밀키트(Meal Kit)도 대세로 자리 잡았다. 밀키트는 요리 종류에 따라 손질된 식재료와 양념을 사람 수에 맞춰 조리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제품이다. HMR에 비해 손이 가기는 하지만 훨씬 신선하고 질 높은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같은 변화는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CJ제일제당이 올해 3월 말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식소비 트렌드 변화에서는 집밥을 먹는 비중이 83%로 지난해보다 23.5%포인트 뛰었다. 외식 비중은 3.4%에 그쳤다.

집밥은 세계적 현상
코로나19 확산 이후 집밥 수요 급증으로 국제 원자재 시장에서 쌀값이 폭등했다.

이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시장조사기관 AMC글로벌이 미국 소비자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응답자의 32%가 “코로나19로 외식보다 가정에서 직접 만든 음식을 더 먹을 생각”이라고 답했다. 35%는 “실제로 가정에서 더 많은 음식을 만들고 있다”라고 했다. 그중 20%는 “코로나19 사태 종식 이후에도 빵을 직접 만들어 먹을 계획”이라고 답했다.
코로나19로 손님이 줄어든 유명 식당들도 이 같은 집밥 열풍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뉴욕의 유명 국수 체인점인 시안은 소고기와 돼지고기 등 4가지 메뉴를 담은 밀키트를 출시했다. 유명 레스토랑인 피터 루거 스테이크하우스는 문을 연 지 133년 만에 배달 서비스를 하기로 했다. 유명 요리사들도 자신의 이름을 단 밀키트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도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비교해 외식을 줄이고 집밥을 늘렸다는 이들의 비중이 70%에 이른다. 집에서 식사를 하지만 좀 더 특별한 메뉴를 찾는 이들이 늘면서 관련 식품 시장이 호황이다. ‘집에서 즐기는 특별한 카레요리’라는 슬로건을 내건 한 카레 제품은 발매 2개월 만에 1,000만 개를 판매했다. 집에서 간편하게 아침을 해결할 수 있는 편의점 체인 로손의 새 제품도 발매 9일 만에 440만 개가 팔렸다.
외식문화가 발달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 역시 마찬가지다. 집에서 조리해 먹을 수 있는 각종 레시피를 소개하는 TV 프로그램과 잡지가 인기를 끌고 있다.

식품시장 바꾸는 집밥 트렌드

배달음식 시장이 확대된 것도 집밥 트렌드에서 빼놓을 수 없다. 올해 4월 온라인 음식서비스 거래액은 지난해 같은 달 대비 84% 늘었다. 배달 애플리케이션 사용자도 3,000만 명에 육박하며 관련 시장은 이미 2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집밥 역시 되돌릴 수 없는 트렌드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주목할 점은 집밥이 단순히 양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택근무를 하는 직장인 사이에선 ‘샐러드 도시락’이 뜨고 있다. 편의점 GS25의 닭가슴살 샐러드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76.6% 늘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계속되면서 운동량이 줄어 혼자 먹는 밥은 더 가볍게 먹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HMR 중에는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국과 탕 종류의 판매가 늘고 있다. 위메프에 따르면 2월 한 달간 즉석 삼계탕 매출은 321% 증가했다. 대상 종가집의 프리미엄 간편한식 종가반상 중 ‘남도추어탕’ 매출은 2월에 전월 대비 17배 늘었다. 아워홈의 ‘푸짐한 갈비탕’ ‘진한추어탕’ 등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신선식품 중에서는 보양식 재료가 잘 팔렸다. 홈플러스 온라인 몰에서 2월 한 달간 전복과 토종닭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45%, 219% 매출이 증가했다.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이 늘면서 ‘완성 소스’ 수요도 증가하는 추세다. HMR이나 배달 음식을 먹더라도 입맛에 맞춰 맛을 조금 더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변화에 맞춰 식품산업도 꾸준히 관련 식품 생산을 늘려갈 전망이다. 해외에서도 늘어나고 있는 수요에 맞춰 한국의 HMR과 밀키트 등이 세계를 제패하는 ‘K-집밥’ 시대도 올 수 있다.